코로나19로 달라진 4·3 추념식…'아직도 오지 않은 제주의 봄'

72주년 제주 4·3 희생자 추념일

"4·3 유족이세요? 올해는 제만 올리고 가셔야 합니다. "
제주4·3 희생자 추념일인 3일 오전 제주시 봉개동 4·3 평화공원 추념식장.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영향으로 이날 추념식은 예년과 달랐다.

참석자들은 행사장 입구서부터 건강검진표를 작성해야했고 체온계와 화상 카메라를 통한 이중 발열 검사가 이뤄졌다. 행사 관계자는 참석자 한 명 한 명의 신원을 확인하고, 행방불명인 묘역이나 위패봉안실에 제를 지내러 온 유족에게 올해는 코로나19 여파로 추념식 행사에 참석할 수 없으니 제만 지내고 돌아가 달라고 당부했다.

발 디딜 틈 없었던 행사장도 고요했다.

추념식 좌석도 1m간격으로 150여 개만 배치됐다. 평화공원 입구와 부스 곳곳에는 손 소독제가 놓여 있었다.

행사장 전체에는 분무기를 사용한 방역이 이뤄지고 있었다.
매년 4·3유족으로 가득하던 행방불명인 묘역도 이날은 눈에 띄게 한산했다. 4·3 당시 행방불명 돼 시신조차 찾지 못한 희생자의 이름이 새겨진 3천8천여 기의 표석들만이 70여년 세월의 그리움만큼이나 무겁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유족 일부만 예년보다 일찍 묘역을 찾아 마스크를 착용하고 제를 지냈다.

4·3 당시 아버지를 잃은 양찬범(74)씨는 아버지께 술을 올리다 그날의 한(恨)을 토해냈다.

양씨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아버지 행방을 알지 못해 시신이라도 찾으려 도내 4·3 학살터 곳곳을 뒤지고 다녔다"며 "그러다 1999년 추미애 국회의원이 4·3사건 관련 국가 기록물을 공개하면서 아버지의 사망 경위는 알게 됐지만, 그게 전부다"라고 눈물을 훔쳤다.

제주신문사에 근무하던 양씨의 부친은 4·3 당시 이유도 모른 채 불법 군사재판에서 5년형을 선고받고 목포형무소에서 수형생활을 하다 6·25 때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다.

양씨는 함께 온 아들 양철식(51)씨와 함께 그리운 아버지의 얼굴을 쓰다듬듯 표석을 닦고 또 닦으며 연신 눈물을 참았다.
4·3은 한평생 아버지의 얼굴을 볼 수도, 만질 수도 없게 했다
윤영준(71)씨는 부인 이화자(68)씨와 손녀 윤혜리(12)양과 함께 4·3 당시 행방불명된 아버지의 표석 앞에서 제사를 지냈다.

윤씨의 부친은 윤씨가 태어나기 12일 전인 1948년 7월 5일 주정 공장에 끌려갔다가 행방불명됐다.

윤씨는 "어머니께 아버지가 밭에서 보리를 갈다가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갔다고 들었다"며 "토벌대가 2만원을 가지고 오면 풀어주겠다고 해 어머니가 돈을 준비해 주정공장으로 간 이틀사이 행방불명됐다"고 말했다.

윤씨 부부는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당시 혹시나 배가 많이 고프진 않으셨을까 걱정이 된다며 한껏 쌓아 올린 고봉밥에 카스텔라, 갖가지 전을 준비해 올렸다.

손녀 윤혜리양은 처음 본 증조할아버지 표지석과 함께 사진을 찍으면서 증조할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다.

유족 발길은 예년보다 줄었지만, 까마귀는 유족의 마음을 대변하듯 어김없이 구슬프게 울어댔다.

위패봉안실 입구에도 발열 카메라가 설치돼 가장 먼저 유족을 맞이했다.
남편과 함께 아버지 위패를 찾아온 김임생(79·여)씨는 "아버지는 4·3 당시 서북청년단에 의해 제주시 한림읍 수원국민학교에서 사살당했다"며 "내 나이 7살 때였다"고 눈물을 훔쳤다.

김씨는 "비록 아버지는 억울함을 풀지 못하고 돌아가셨지만, 앞으로 4·3 문제가 명확히 밝혀져 남아있는 사람들의 억울함을 풀 수 있기를 바란다"고 기대했다.

앞서 제주도는 코로나19 여파로 올해 추념식을 유족과 행사 관계자 150여 명만 참석한 가운데 간소하게 치른다고 밝혔다.

또 도민과 유족에게 이날 4·3평화공원 참배를 자제해 '사회적 거리 두기'에 적극 동참해 달라고 당부했다
대신 4·3평화재단에서 운영하는 온라인 추모관을 통해 추모의 시간을 가져달라고 전했다.

아울러 4·3유족회도 정부의 방역 관리 지침에 따라 행사 진행 관계자를 제외한 65세 이상 감염병 취약계층은 추념식에 참석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dragon.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