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국가 근간인 '사회계약' 무너진다…키신저 "리더여, 자유주의를 수호하라"

헨리 키신저 前 美국무장관의 경고

"민주국가 핵심가치 지켜야"
팬데믹 명목…빠르게 '통제사회'로
각국 봉쇄조치·군대 동원·현금 살포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이 각국의 정치 지도자들에게 자유주의 원칙을 수호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대응해 각국에서 도시 봉쇄, 군대 동원, 현금 살포 등 각종 긴급조치가 쏟아져 나오는 가운데 던진 메시지다.

노벨평화상을 받은 국제정치 분야 대가인 키신저 전 장관은 지난 3일 월스트리트저널(WSJ)에 기고한 칼럼에서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에 대응한다는 명목으로 권력이 비대해지면 근대 국가를 이룬 근간인 사회 계약이 무너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키신저는 “강한 권력자가 외부의 적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면서 국가가 시작됐지만 이후 안전, 질서, 경제적 번영, 정의 등 사람이 혼자서는 달성할 수 없는 가치를 보장하는 사회 계약을 통해 적법성과 정통성을 확보한 국가 시스템이 정착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코로나19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권력과 적법성 사이의 균형이 깨지면 사회 계약도 무너진다”며 “민주 국가는 국내 정치와 국제 외교에 일정한 제약을 두고 핵심 가치들을 지켜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는 특히 “글로벌 교역과 사람의 자유로운 이동을 기반으로 번영하는 시대에 국경을 닫는 것은 시대착오적 발상”이라고 비판했다.

키신저 전 장관은 “코로나19 팬데믹이 끝나더라도 세계는 그 이전과는 전혀 같지 않을 것”이라며 “바이러스를 박멸하고 경제를 살리는 동시에 새로운 시대를 계획하는 작업을 서둘러야 한다”고 했다.

키신저 전 장관이 이처럼 강한 우려를 나타낸 것은 세계 곳곳에서 권력자에게 더 강한 권력을 부여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어서다. 헝가리에서는 유럽연합(EU) 출범 이후 회원국 가운데 처음으로 독재 정부가 등장했다. 헝가리 의회는 지난달 30일 총리에게 국가비상사태를 무기한 연장할 수 있도록 하는 ‘코로나 비상사태법’을 통과시켰다. 국가비상사태 상황에서 총리는 선거를 치르지 않을 수도 있고, 법률의 효력을 갖는 명령도 내릴 수 있다. 오르반 빅토르 헝가리 총리는 법 통과 전인 지난달 11일 비상사태를 선포했다.이에 마테오 렌치 전 이탈리아 총리는 “헝가리를 EU에서 제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코로나19로 인한 비상조치는 제한적이어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러시아에서도 대통령이 갖고 있는 국가비상사태 선포 권한을 총리에게도 부여하는 법안이 지난 2일 통과됐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총리에게 권력을 이양하는 개헌과 함께 자신이 총리가 돼 사실상 종신 집권하려는 계획을 추진 중이다.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개인의 자유를 어디까지 제한할 것인가를 두고 각국의 고민도 커지고 있다. 중국은 지난 1월부터 두 달 넘게 진원지인 우한과 후베이성에 강도 높은 봉쇄 조치를 시행했다. 이탈리아도 지난달 10일 전국에 이동제한령을 내렸고 미국도 이미 전국민 3분의 2에 자택대피령을 발령했다.한편 WSJ는 지난달 28일자로 ‘팬데믹이 세상을 어떻게 바꿀까’라는 타이틀로 코로나19 이후의 삶을 조망하는 17인의 명사 칼럼을 게재했다. 에릭 슈밋 전 구글 회장은 이 칼럼에서 코로나19를 계기로 ‘진짜 디지털 인프라’가 깔릴 것으로 예상했다. 원격 의료, 원격 학습 등이 더욱 많은 사람에게 그리고 싸고 효율적인 방식으로 제공될 것이란 전망이다. 제러드 베이커 전 WSJ 편집장은 위기 이후 글로벌 공급망을 자국 내로 끌어들이려는 움직임이 강화될 것으로 전망했다. 명사 전기 전문 작가인 월터 아이작슨은 생명과학이 원자의 발견, 상대성이론에 이어 제3의 과학혁명을 주도할 것으로 내다봤다.

강현우 기자 hkang@hankyung.com
WSJ의 코로나 이후 전망 칼럼들은 WSJ와 독점 제휴를 맺고 있는 한국경제신문 홈페이지(www.hankyung.com/tag/포스트-코로나)에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