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아시아의 바이킹' 발해…동아지중해 누비며 무역 강국 자리매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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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발해의 산업·무역·해양활동
철·금 등 풍부한 지하자원
모피·어업·목축업 활발
일본과 활발한 해양무역

발해 산업의 실상은 생태환경과 후발 국가들, 계승 민족들의 삶과 일본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노성(백두산 근처)의 쌀이 유명하고, 책성(훈춘)의 된장은 수출품이었으며, 만주 일대와 연해주라는 지경학적 환경을 활용해 특수한 산업을 발전시켰다. 위성(함경북도 무산)의 철도 유명했는데 ‘철주’라고 부른 요동 안시성 일대는 동아시아 최고의 철 생산지였다. 발해는 고구려에서 물려받은 기술력으로 풍부한 철을 가공해 농기구와 무기 등을 대량 생산했다. 또 풍부한 금과 은(삼강평원 일대)으로 일본제 수은을 활용한 공예품을 만들었는데 일본에서 ‘당나라에서 진귀한 것을 많이 보았으나, 이런 기괴한 것(공예품)은 없었다’고 할 정도로 극찬받았다(방학봉 《발해경제사연구》).흑룡강 중류 이하, 송화강 하류, 목단강 하류, 우수리강 유역은 대규모 침엽수림지대라서 약초를 비롯해 꿀·산삼·인삼·녹용 등의 수출품이 풍부하게 나왔고, 호랑이·표범·곰·사슴·늑대·토끼·여우·족제비·담비가 서식했다. 발해는 원조선(고조선)·부여·고구려처럼 모피 가공을 주요 산업으로 발전시켜 왕실과 수령의 부를 확장시키는 수출품으로 활용했다. 러시아가 17세기 중반부터 극동 지역으로 진출한 중요한 이유는 질 좋은 모피를 획득할 수 있었고, 모피 세금 또한 많았기 때문이다. 베링해를 발견한 것은 해달피를 얻기 위해 이동하는 과정에서였다.
또 강(江)어업도 중요한 사업이었다. 사료에는 미타호(흥개호)의 붕어만 특산물로 기록돼 있지만, 흘러든 유기물로 인해 물색이 검게 된 송화강 하류 그리고 흑룡강(아무르강)에는 엄청난 크기의 물고기가 많았다. 이 때문에 근대까지도 어업은 동만주의 주력 산업이었고, 소수 민족은 생선을 식량·비료로 사용했으며, 껍질로는 의복·신발·장식품을 생산하는 어피문화를 발전시켰다.
산둥 제나라로 말(馬) 수출
본격적인 무역 국가로 성장한 발해는 당나라에 무역을 겸한 사신단을 132차례나 파견했고, 투르크(돌궐)와도 교역했다. 특히 고구려 후기부터 교류해온 소그드인(우즈베키스탄 지역)과 함께 실크로드 무역망에 참여했으며, 경교(동방기독교) 같은 서쪽 문화도 수용했다. 그런데 국가 정책, 과학기술과 산업, 발해인들의 기질과 능력이 발휘된 분야는 일본과의 해양 무역이었다.8세기의 발해와 일본은 신라를 남북에서 압박하기 위한 정치·군사 교류에 비중을 뒀다. 특히 일본은 항해 능력이 달려 견당사(遣唐使)를 파견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국제 정세에 관한 정보를 얻고, 선진 문물을 수용하기 위해 발해와 적극적으로 교류했다(구난희 《발해와 일본의 교류》). 하지만 9세기에 가까워지면서 냉전 시대가 끝나고, 무역의 시대로 바뀌며 발해·일 관계도 ‘쌍방교류’에서 경제교류가 주목적인 발해의 ‘일방교류’로 전환됐다.
일본에 34차례 공식 사절단 파견
발해는 일본에 공식 사절단을 34차례나 파견했다. 사신선에는 관리와 상인 외에 지방세력인 수령도 정책적인 배려로 동승할 수 있었다. 그런데 746년에는 발해인과 철리부(하바로프스크 추정) 사람이 무려 1100여 명이나 출우(아키타현)에 도착했다가 송환됐다. 이런 사례를 보면 발해의 민간 상인은 동해를 건너 일본 지방세력과 사(私)무역을 벌였고, 철과 주석을 교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에 상륙한 사신단 일부는 항구에 세운 객관(客館)과 객원(客院)에서 몇 달씩 장사를 했으며, 나머지는 수도로 들어가서 외교 활동을 벌이고 본격적인 무역을 했다.
모피·꿀·철·명주·다시마 등 무역
그렇다면 험난한 겨울 동해를 건너다닌 발해인의 항해술과 조선술은 어느 수준이었을까? 뗏목 ‘발해 1300호’는 1997년 12월 31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항을 출항했다. 항해 25일째인 1998년 1월 24일 새벽에 오키제도의 도고섬에 좌초해 4명 전원이 유명을 달리했다. 발해선도 두세 번의 예외를 두고는 음력 10월에서 1월 사이에 북서풍을 이용해 동해를 건넜고, 귀국할 때는 남동풍(信風)을 타고 3월에서 8월 사이에 항해했다. 당연히 ‘천문생(天文生)’이란 항법사가 동승했다. 842년에 발해가 일본에 보낸 문서에는 ‘배들이 바람을 점치고 때를 기다려 출항한다’는 내용이 있다(《속일본후기》). 하지만 험난한 항해라서 첫 사신단 파견 때는 승선자의 3분의 1이 희생당했고, 739년에는 1척이 표류해 40명이 죽었다. 776년에는 187명 중 46명만 생존했으며, 786년에는 표류하다가 65명 중 12명이 하이인(아이누족)에게 죽고 41명만 생존했다.
조선술은 전(前)근대에는 국가 산업으로 경제력과 과학·공학기술의 결정체였다. 발해선은 초기엔 20명 전후가 승선할 수 있는 소선(小船)이었고, 17척으로 325명(771년)이 일본에 간 경우도 있다. 9세기부터는 거의 100명 이상이 승선할 수 있을 정도로 배가 커졌다. 보통은 일본의 견당선과 비교해 발해의 조선술이 뒤떨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는 항해 상황을 왜곡하고, 항해술과 조선술의 메커니즘에 무지한 일본 학자들의 주장을 추종한 결과다. 일본의 사신단은 항해 횟수가 얼마 되지 않았고, 무수한 희생을 치렀으며, 때로는 승려·상인과 마찬가지로 발해선과 신라 민간선의 도움을 받아 당나라와 교류하는 수준이었다.
작고 날렵하며 바닥이 뾰족한 발해船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