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d, 정크본드 매입 '무차별 돈풀기'…"뒷감당 어쩌나" 우려도

'최종 대부자'서 '최초 대부자'로 나선 美 중앙은행

"경기회복 때까지 권한 사용"
일부선 지나친 시장 개입 비판
미국 중앙은행(Fed)이 제로금리, 무제한 양적완화(QE)에 이어 9일(현지시간) 자산 매입 대상을 정크본드까지 확대했다. 제롬 파월 Fed 의장은 “경기회복 경로에 올라설 때까지 권한을 공격적으로 계속 쓰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따라 회사채시장이 상승하는 등 미 금융시장은 급속히 안정됐다. 월가 일부에선 ‘달러 홍수’가 가격 형성이란 시장의 고유 기능까지 해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올 정도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이날 하이일드(고수익) 채권에 투자하는 대표적 상장지수펀드(ETF)인 ‘아이셰어즈 아이박스 하이일드 회사채 ETF’는 6% 이상 급등했다. Fed의 매입 약속을 믿고 투자자들이 몰려든 덕분이다. 투자등급 회사채 ETF는 3.32% 상승했다.
파월 “Fed 권한 공격적으로 사용할 것”

Fed는 이날 2조3000억달러 규모의 새로운 QE 프로그램을 발표하고 정크본드 등 그동안 매입하지 않던 투기등급 회사채까지 사기로 했다. 지난 3월 설치한 ‘프라이머리마켓 기업 신용기구(PMCCF)’ ‘세컨더리마켓 기업 신용기구(SMCCF)’를 통해 투자등급 회사채 외에 같은 달 22일 이후 투자등급에서 투기등급으로 떨어진 기업의 정크본드까지 매입하기로 한 것이다. ‘타락 천사(fallen angel)’라고 불리는 이런 강등 기업의 회사채는 그동안 회사채시장의 불안 요인으로 작용해왔다. 기관투자가들은 내부 위험관리규정에 따라 매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3월 24일 강등된 대표적 ‘타락 천사’인 포드의 2031년 만기 채권(금리 연 7.45%)은 전날 달러당 71센트에서 이날 89센트로 급등했다.Fed는 이와 함께 ‘자산담보부증권 대출기구(TALF)’의 매입 대상을 투자등급 상업용 모기지채권(MBS)과 대출담보부채권(CLO) 등까지 확대했다. ‘월세 대란’으로 유동성 위기에 직면한 상업용 MBS시장과 투기등급 기업의 대출채권을 묶어서 만든 파생상품인 CLO까지 지원하겠다는 것이다. 또 ‘메인스트리트 대출 프로그램’을 가동해 임직원 1만 명 이하, 연매출 25억달러 미만 기업을 대상으로 6000억달러를 대출해주기로 했다.

이날 채권시장뿐 아니라 뉴욕증시도 상승했다. 다우지수가 1.22% 급등했고, S&P500지수는 1.45%, 나스닥은 0.77% 올랐다. 블룸버그통신은 “전주 실업급여 신청자 수가 또다시 660만 명에 달한 것으로 발표됐지만 증시와 채권시장은 상승했다”며 “투자자들은 Fed의 조치를 크게 환영했다”고 보도했다. 안토니오 와이스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선임펠로는 WSJ와의 인터뷰에서 “Fed는 과거에 해온 역할 이상을 하고 있으며 지금 경제는 그런 걸 필요로 한다”고 말했다.

파월이 금융위기 때 벤 버냉키 전 Fed 의장의 조치를 뛰어넘는 초강수를 꺼내든 것은 미국 경제 전망이 갈수록 어두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경제 셧다운이 길어지면서 실업자가 3주 새 1700만 명 늘어났고, 올 2분기 경제가 30% 역성장할 것이란 관측이 쏟아지고 있다. 파월은 이날 브루킹스연구소 주최 화상좌담회에서 “경기회복 경로에 올라섰다고 확신할 때까지 강하고 선제적이며 공격적으로 Fed의 권한을 계속 사용하겠다”고 밝혔다.‘최종 대부자’에서 ‘최초 대부자’로

하지만 일부에서 Fed의 지나친 시장 개입을 둘러싼 우려도 나온다. 전통적으로 중앙은행은 ‘최종 대부자(lender of last resort)’ 역할을 해왔는데 지금의 Fed는 ‘최초 대부자(lender of first resort)’로 바뀌고 있다는 지적이다.

WSJ은 이날 사설에서 “미국의 셧다운이 몇주 더 길어지면 Fed는 미국의 최초대부자가 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새로운 위기가 나타나면 중앙은행이 무조건 개입할 것이라는 나쁜 기대를 시장에 주고 있다는 지적이다.스콧 미너드 구겐하임 수석투자책임자(CIO)는 “Fed가 신중하고 책임있는 투자를 그대로 놔두지 않겠다는 걸 밝혔다”고 비판했다. Fed가 위험한 정크본드까지 무차별로 사들이기로 해 ‘좋은 기업을 골라내는’ 시장의 기능이 교란되고 있다는 뜻이다. 스반 헨리크 노스먼트레이더 설립자도 “무책임한 투자자가 저지른 위험한 투자라도 모두 구제해주기로 한 것”이라고 비난했다.

블룸버그통신은 “어느 순간 쏟아부은 수십조달러에 대한 신뢰성에 의문이 생길 것”이라며 “이런 의문은 달러가치 하락과 인플레이션을 부를 수 있다”고 지적했다. WSJ은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정부와 기업, 가계가 산더미 같은 빚에 시달릴 것이라는 점”이라고 보도했다.

이날 Fed의 자산은 사상 최대인 6조1300억달러로 급증했다. 3월 초 4조2000억달러에서 한 달여 만에 약 2조달러 증가한 것이다. 블랙록은 올해 Fed의 자산이 10조달러를 넘어설 것으로 예상했다.

뉴욕=김현석 특파원 reali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