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거일 칼럼] 현길언, '4·3 사건'을 증언한 작가

4·3에 대한 정직한 기록은 현길언의 책이 유일
北의 책동·민간 피해의 진실을 경험으로 증언
그의 작품은 왜곡의 지층 아래 묻히지 않을 것

복거일 < 사회평론가·소설가 >
옛 사회의 모습을 살피려면, 역사책에서 지식을 얻어야 한다. 사회 구조와 제도, 풍속에 관한 설명을 들어야 그 사회를 이룬 근본적 조건들을 알게 되고 그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상상 속의 모습은 추상적이어서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 사회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보고 느꼈을 생생한 질감은 얻기 어렵다. 그런 공백을 메워주는 것이 당대 사람들이 남긴 문학이다.

트로이의 유적에서 고고학자들은 많은 정보를 얻어내 그곳에서 번창했던 사회의 모습을 보여줬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트로이 사람들의 내면 풍경까지 그려보기는 어렵다. 호메로스의 서사시들이 전해오기에, 우리는 그 아득한 시공에 살았던 사람들의 생각과 행태를 생생하게 그릴 수 있다.우리 역사에서 결정적 시기였던 20세기 초엽에 대해서도 같은 얘기를 할 수 있다. 역사가들은 서양 문명을 열심히 받아들여 변신하는 조선 사회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도 그런 모습은 어쩔 수 없이 추상적이다. 이광수의 《무정》을 읽으면, 그 사회가 문득 생생해진다. 사람들의 경험을 총체적으로 담은 이야기라는 사정 덕분에, 문학 작품들은 역사 서술의 긴요한 부분이 된다. 일본과 중국의 개화기를 다룬 책들이 각기 나쓰메 소세키와 루쉰의 작품을 으레 인용하는 것도 사정이 같다.

지난달 10일 서거한 현길언은 ‘4·3 사건’을 집요하게 다룬 작가다. 그는 어릴 적에 겪은 그 사건을 작품에 담았다. 대한민국의 탄생 과정에서 가장 큰 시련이었던 그 사건을 제대로 아는 데엔 그의 작품들이 긴요하다. 그 사건에 관한 책들이 정확하다 하더라도, 그의 작품들을 읽어야 비로소 우리는 그 끔찍한 사건을 겪은 사람들의 고달픈 삶을 생생하게 느끼고 그 사건의 본질을 깨닫게 된다. 실제로는 그 사건을 다룬 역사책과 보고서들이 대부분 편향되거나 왜곡됐으므로, 정직한 기록으로는 그의 작품들이 거의 유일하다.

대한민국 창립의 마지막 과정인 1948년의 ‘5·10 총선거’를 방해하기 위해 북한 정권은 제주도 남로당 책임자 김달삼에게 반란을 일으키도록 했다. 4월 3일 남로당 요원들은 제주도의 모든 경찰서를 일제히 습격해서 경찰관과 가족들을 무참히 살해했다. 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미군정은 국방경비대와 경찰 병력을 파견했다. 그러나 부락들에 근거를 두고 한라산의 험준한 지형을 이용해서 맞서는 반란 세력을 진압하기는 힘들었다. 게다가 당시 국방경비대엔 좌익이 깊숙이 침투해서 제주도 현지에서 11연대장이 부하에게 피살됐고, 파견 명령을 받은 14연대는 주둔지에서 반란을 일으켜 ‘여수순천반란사건’으로 사태가 확대됐다.이처럼 어려운 진압 과정에서 많은 제주도 인민이 해를 입었다. 반란군이 경찰관과 가족들을 무참히 살해한 것에 대한 분노가 컸고, 산악 지역의 유격전이어서 진압이 어려웠던 데다, 반란군과 연고가 있는 주민들에 대한 의심이 깊었으므로 민간인들의 피해는 클 수밖에 없었다.

근년에 역사책들이 대한민국을 부정적으로 그리면서, 4·3 사건에 대한 기술도 사건의 본질은 외면하고 진압 과정에서 나온 문제들을 과장하게 됐다. 현길언은 자신의 경험에 바탕을 두고 4·3 사건을 정직하게 그렸다. 그 사건이 대한민국의 탄생을 막으려는 북한 정권의 책동에서 비롯했고 제주도 사람들은 반란군과 진압군 사이에서 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줄곧 알렸다.

“4·3사건은 통일정부 수립운동”이라고 주장하는 세력이 정치 권력과 문화 권력을 아울러 장악한 우리 사회에서 그런 태도는 그를 외롭게 만들었다. 큰 역병이 도는 판이라, 이승을 하직하는 자리도 쓸쓸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은 외롭지 않을 것이다. 왜곡의 두꺼운 지층에서 4·3 사건의 진실을 찾으려는 사람들은 그의 작품을 만날 것이다. 인기 높은 작가들이 대부분 잊혀진 세월에도 그의 작품들은 생기를 지니고 대한민국이 탄생하던 모습을 정직하게 증언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