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제조업은 영웅'이라는 정부의 두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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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현장 애로 찾기는 외면“기사에 나온 ‘정유업체의 한 임원’이 누군지 알려줄 수 있나요?”
장관 비판 여론 잠재우기 급급
김재후 산업부 기자 hu@hankyung.com
한국경제신문이 지난 7일자로 <존망의 기로에 선 주력산업,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어디에 있나>를 보도하자 며칠 동안 전화가 빗발쳤다. 산업부 출신의 공공기관장을 비롯해 석유 관련 협회, 민간 정유사에서도 10여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공교롭게도 그들이 궁금해한 건 같았다. 기사 내용대로 한국의 주력 산업이 얼마나 어려운 상황인지를 묻는 사람은 없었다. 기사에 나온 “어디 한 곳이 부도나면 그때서야 산업부가 제대로 들여다볼까요?”라고 말한 정유업체 임원을 찾는 일이 최우선 관심사였다.
이유도 똑같았다. 산업부 내 석유산업을 담당하는 과(課)에서 알고 싶어한다는 것이었다. 산업부의 에너지자원실과 자원산업정책관실, 석유산업과가 총동원돼 민간 기업을 움직인 셈이다.
정부를 비판하는 기사에 관련 부처가 대응하는 건 당연하다. 실제 산업부는 다음날 A4용지 네 장에 걸친 장문의 해명자료를 냈다. 자료엔 지난 2월 18일 이후 7회에 걸친 성윤모 장관의 현장 행보가 담겼다. 문제는 장관의 심기를 거슬렀다는 이유로 해당 발언을 한 민간 기업 임원을 색출하려는 관료들의 태도다. 전화를 건 인사들은 하나같이 “산업부가 누군지 찾아내 즉각 보고하라고 했다”며 떨리는 목소리로 분위기를 전했다.궁금하면 산업부 담당 공무원이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묻거나 해명하면 될 일이다. 산업부는 직접 나서는 대신 ‘보이지 않는 손’을 이용해 민간에 문제 해결을 떠넘겼다. 한 정유업체 관계자는 “누가 말했는지 알 길이 없으니 가능성이 있는 인사들을 모아 예상 발언자 명단까지 작성하고 있다”고 했다. ‘칼자루’를 쥐고 있는 정부에 밉보일 수 없어 기업들은 어쩔 수 없이 지시를 따르고 있다.
이런 과정을 지켜보고 대응하면서 드는 의문은 따로 있었다. 정부에 비판적인 발언을 한 기업인을 찾는 정성으로 존망의 기로에 선 기업을 찾아 어려움을 풀기 위한 대응책을 마련하면 어떻겠느냐는 것이다. 산업부의 원래 존재 목적대로 말이다.
김용범 기획재정부 1차관은 12일 ‘코로나 위기와 우리 경제의 숨은 영웅들’이라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김 차관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충격에 한국이 버틸 수 있었던 이유로 제조업 경쟁력을 꼽으며 ‘숨은 영웅’이라고 추켜세웠다. 기업인들은 ‘제조업 종사자=영웅’이라는 찬사와 비판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완력을 휘두르는 정부의 두 얼굴에 어리둥절해 하고 있다. 기업에 정부는 여전히 ‘갑(甲)’이다. 이 글을 읽고 블랙리스트를 작성한다고 말한 업체 관계자를 산업부가 또다시 찾아나서지 않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