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술 기행] 강원 홍천 전통주조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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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만든 누룩으로 빚어 풍부한 맛과 향
강원도 홍천은 예부터 막걸리로 유명한 지역이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규경은 평양의 감홍로주, 한산의 소국주, 여산의 호산춘주와 함께 홍천의 백주(막걸리)를 조선 4대 명주로 꼽았다고 한다.
홍천 내촌면 백암산 자락에 있는 전통주조 예술은 술 잘 빚는 양조장이 많은 홍천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곳이다.
전통 누룩을 직접 띄워 만든 이곳의 술은 이름만큼이나 감각적이면서 깊은 풍미를 자랑한다. ◇ 만강에 비친 달, 동몽…오감을 자극하는 술
전통주조 예술의 정회철 대표가 맛보라며 내온 막걸리는 빛깔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만강에 비친 달'이라는 이름처럼 노오란 달빛이다.
찹쌀과 누룩에 홍천의 특산물인 미니 단호박을 섞어 노란빛이 돈다. 한모금 들이키니 단호박의 달콤함과 산미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시중의 막걸리처럼 톡 쏘는 탄산은 거의 느낄 수 없지만, 감칠맛 나는 신맛이 단맛과 어우러져 진하면서도 상큼하게 느껴진다.
막걸리에 이어 맛본 '동몽' 역시 찹쌀과 단호박, 누룩으로 빚은 약주다. 맑은 금빛이 아름다워 투명한 와인 잔에 따라 마시는 게 제격이다.
한 모금 마시니 단호박의 은은한 단 향과 기분 좋은 산미, 알코올의 쌉싸름함 등 다양한 맛과 향이 어우러져 깔끔하면서도 묵직한 여운을 남긴다.
시중의 막걸리나 약주에서 느낄 수 없는 풍부한 맛과 향의 비결은 이곳에서 직접 띄운 누룩에 있다.
정 대표는 "우리나라 전통주의 맛은 누룩에서 나오는 것"이라며 "대부분의 업체가 외부에서 누룩을 사다 술을 빚기 때문에 술의 맛과 향에 차이가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쌀을 술로 만들어 주는 것은 미생물이에요.
누룩을 띄운다는 것은 자연의 상태에서 미생물을 착상시키고 번식시키는 과정이죠. 자연적으로 배양된 전통 누룩으로 빚은 술은 맛과 향이 깊고 풍부합니다.
시중에서 판매되는 저렴한 막걸리는 누룩을 쓰지 않고 실험실에서 인공적으로 배양된 균을 써요.
누룩을 사용하는 전통주 양조장들도 대부분 누룩을 직접 띄우지 않고 공장에서 만들어진 누룩을 사다 씁니다.
많은 양조장이 같은 누룩을 쓰니 맛이 비슷해질 수밖에 없죠." ◇ 고시촌 스타강사에서 술도가 주인으로
독특한 술맛만큼이나 정 대표의 이력도 독특하다.
서울대 법대 81학번인 그는 1997년 사법 고시에 합격했다.
하지만 노동운동 이력 때문에 판사임용에 고배를 마신 뒤 고시학원 강사로 나섰다.
연수원 시절 틈틈이 써 놓은 헌법 수험서가 인기를 끌고 있던 터였다.
고시촌에 진출하자마자 정 대표는 스타강사로 이름을 날렸다.
그가 집필한 헌법 수험서는 사시 준비생들에게 '헌법의 정석'으로 통했다.
충남대 법학대학원 교수를 맡기도 했던 그가 외딴 산골로 내려와 술도가를 차린 것은 원인 모를 병 때문이었다.
누적된 과로로 몸에 과부하가 걸린 탓인지 극심한 두통에 시달렸다고 한다.
5분 이상 집중해서 책을 읽을 수 없었고 밤잠도 제대로 이루기 힘들 정도였지만 병원에서는 정확한 진단을 내리지 못했다.
결국 1년 6개월 만에 교수직을 그만둔 뒤 시골로 내려왔고, 취미 삼아 했던 술 빚기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 직접 만든 누룩이 술맛의 비결
홍천에 터를 잡은 정 대표가 본격적으로 술 빚기에 나선 것은 2012년이다.
내촌면의 특산물인 단호박을 이용한 막걸리와 청주를 선보였다.
정 대표 역시 다른 양조장처럼 초기에는 누룩을 사다 술을 빚었다.
하지만 공장에서 만든 누룩으로는 술맛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고, 결국 누룩을 직접 만들기 시작했다.
누룩을 만드는 것은 술 빚기보다 더 까다롭고 힘들다고 한다.
변수가 많기 때문이다.
우선 도정하지 않은 통밀을 분쇄해 물과 잘 섞어 반지 모양으로 성형한 뒤 누룩을 띄운다.
한 달가량 띄운 누룩은 또다시 한 달간 잘 건조한 뒤 가루로 빻아 이틀 정도 법제한다.
법제는 낮에는 햇볕을 쬐고 밤에는 이슬을 맞게 해 잡균과 나쁜 냄새를 제거하는 과정이다.
'만강에 비친 달'과 '동몽'은 이렇게 두 달에 걸쳐 만들어진 전통 누룩에 홍천에서 난 찹쌀과 미니 단호박, 암반수를 섞어 빚은 술이다.
옹기에 넣어 고온에서 2∼3개월 발효시킨 뒤 저온에서 한 달 이상 숙성한다.
누룩 만드는 과정까지 합하면 5개월 이상이 걸리는 셈이다. 이렇게 완전히 발효되고 숙성된 술은 숙취가 전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정 대표는 "5일 만에 만들어지는 시중의 막걸리는 감미료를 넣고 덜 발효된 미숙주 상태로 팔려나간다"며 "이런 미숙주를 마시면 속에서 이산화탄소가 발생해 숙취가 생기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예술에서는 막걸리와 약주뿐 아니라 증류식 소주와 이화주도 만든다.
증류식 소주 '무작'은 2회에 걸쳐 증류하고 2년 이상 숙성시킨다.
53도의 높은 알코올 도수에도 목 넘김이 부드럽고 마신 뒤 은은한 잔향이 입안에 퍼지는 것이 특징이다.
일반인들에게 다소 생소한 이화주는 숟가락으로 떠먹는 걸쭉한 막걸리다.
고려 시대부터 빚었던 전통주로 '배꽃 필 때 빚는다'고 해서 이화주(梨花酒)라고 불린다.
예술에서 만드는 이화주인 '배꽃 필 무렵'은 잣 잎 추출물로 구멍떡을 반죽해 빚는 14도짜리 술이다.
마치 요구르트처럼 새콤달콤해 식욕을 돋우는 애피타이저로도, 입안을 마무리하는 디저트로도 손색없을 것 같다.
백암산 자락 1만6천여㎡의 대지에 자리 잡은 전통주조 예술은 술 빚는 양온소와 누룩 제조실뿐만 아니라 각종 실습과 시음이 이뤄지는 80평 규모의 우리술 문화체험관과 게스트하우스까지 갖추고 있다.
체험관에서는 전통 소주 내리기, 모주 만들기, 전통주 빚기 등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경험할 수 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하룻밤 묵으며 전통주 강의를 듣고 술 빚기 체험을 할 수 있는 1박 2일 프로그램도 운영된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0년 4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연합뉴스
강원도 홍천은 예부터 막걸리로 유명한 지역이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규경은 평양의 감홍로주, 한산의 소국주, 여산의 호산춘주와 함께 홍천의 백주(막걸리)를 조선 4대 명주로 꼽았다고 한다.
홍천 내촌면 백암산 자락에 있는 전통주조 예술은 술 잘 빚는 양조장이 많은 홍천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곳이다.
전통 누룩을 직접 띄워 만든 이곳의 술은 이름만큼이나 감각적이면서 깊은 풍미를 자랑한다. ◇ 만강에 비친 달, 동몽…오감을 자극하는 술
전통주조 예술의 정회철 대표가 맛보라며 내온 막걸리는 빛깔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만강에 비친 달'이라는 이름처럼 노오란 달빛이다.
찹쌀과 누룩에 홍천의 특산물인 미니 단호박을 섞어 노란빛이 돈다. 한모금 들이키니 단호박의 달콤함과 산미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시중의 막걸리처럼 톡 쏘는 탄산은 거의 느낄 수 없지만, 감칠맛 나는 신맛이 단맛과 어우러져 진하면서도 상큼하게 느껴진다.
막걸리에 이어 맛본 '동몽' 역시 찹쌀과 단호박, 누룩으로 빚은 약주다. 맑은 금빛이 아름다워 투명한 와인 잔에 따라 마시는 게 제격이다.
한 모금 마시니 단호박의 은은한 단 향과 기분 좋은 산미, 알코올의 쌉싸름함 등 다양한 맛과 향이 어우러져 깔끔하면서도 묵직한 여운을 남긴다.
시중의 막걸리나 약주에서 느낄 수 없는 풍부한 맛과 향의 비결은 이곳에서 직접 띄운 누룩에 있다.
정 대표는 "우리나라 전통주의 맛은 누룩에서 나오는 것"이라며 "대부분의 업체가 외부에서 누룩을 사다 술을 빚기 때문에 술의 맛과 향에 차이가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쌀을 술로 만들어 주는 것은 미생물이에요.
누룩을 띄운다는 것은 자연의 상태에서 미생물을 착상시키고 번식시키는 과정이죠. 자연적으로 배양된 전통 누룩으로 빚은 술은 맛과 향이 깊고 풍부합니다.
시중에서 판매되는 저렴한 막걸리는 누룩을 쓰지 않고 실험실에서 인공적으로 배양된 균을 써요.
누룩을 사용하는 전통주 양조장들도 대부분 누룩을 직접 띄우지 않고 공장에서 만들어진 누룩을 사다 씁니다.
많은 양조장이 같은 누룩을 쓰니 맛이 비슷해질 수밖에 없죠." ◇ 고시촌 스타강사에서 술도가 주인으로
독특한 술맛만큼이나 정 대표의 이력도 독특하다.
서울대 법대 81학번인 그는 1997년 사법 고시에 합격했다.
하지만 노동운동 이력 때문에 판사임용에 고배를 마신 뒤 고시학원 강사로 나섰다.
연수원 시절 틈틈이 써 놓은 헌법 수험서가 인기를 끌고 있던 터였다.
고시촌에 진출하자마자 정 대표는 스타강사로 이름을 날렸다.
그가 집필한 헌법 수험서는 사시 준비생들에게 '헌법의 정석'으로 통했다.
충남대 법학대학원 교수를 맡기도 했던 그가 외딴 산골로 내려와 술도가를 차린 것은 원인 모를 병 때문이었다.
누적된 과로로 몸에 과부하가 걸린 탓인지 극심한 두통에 시달렸다고 한다.
5분 이상 집중해서 책을 읽을 수 없었고 밤잠도 제대로 이루기 힘들 정도였지만 병원에서는 정확한 진단을 내리지 못했다.
결국 1년 6개월 만에 교수직을 그만둔 뒤 시골로 내려왔고, 취미 삼아 했던 술 빚기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 직접 만든 누룩이 술맛의 비결
홍천에 터를 잡은 정 대표가 본격적으로 술 빚기에 나선 것은 2012년이다.
내촌면의 특산물인 단호박을 이용한 막걸리와 청주를 선보였다.
정 대표 역시 다른 양조장처럼 초기에는 누룩을 사다 술을 빚었다.
하지만 공장에서 만든 누룩으로는 술맛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고, 결국 누룩을 직접 만들기 시작했다.
누룩을 만드는 것은 술 빚기보다 더 까다롭고 힘들다고 한다.
변수가 많기 때문이다.
우선 도정하지 않은 통밀을 분쇄해 물과 잘 섞어 반지 모양으로 성형한 뒤 누룩을 띄운다.
한 달가량 띄운 누룩은 또다시 한 달간 잘 건조한 뒤 가루로 빻아 이틀 정도 법제한다.
법제는 낮에는 햇볕을 쬐고 밤에는 이슬을 맞게 해 잡균과 나쁜 냄새를 제거하는 과정이다.
'만강에 비친 달'과 '동몽'은 이렇게 두 달에 걸쳐 만들어진 전통 누룩에 홍천에서 난 찹쌀과 미니 단호박, 암반수를 섞어 빚은 술이다.
옹기에 넣어 고온에서 2∼3개월 발효시킨 뒤 저온에서 한 달 이상 숙성한다.
누룩 만드는 과정까지 합하면 5개월 이상이 걸리는 셈이다. 이렇게 완전히 발효되고 숙성된 술은 숙취가 전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정 대표는 "5일 만에 만들어지는 시중의 막걸리는 감미료를 넣고 덜 발효된 미숙주 상태로 팔려나간다"며 "이런 미숙주를 마시면 속에서 이산화탄소가 발생해 숙취가 생기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예술에서는 막걸리와 약주뿐 아니라 증류식 소주와 이화주도 만든다.
증류식 소주 '무작'은 2회에 걸쳐 증류하고 2년 이상 숙성시킨다.
53도의 높은 알코올 도수에도 목 넘김이 부드럽고 마신 뒤 은은한 잔향이 입안에 퍼지는 것이 특징이다.
일반인들에게 다소 생소한 이화주는 숟가락으로 떠먹는 걸쭉한 막걸리다.
고려 시대부터 빚었던 전통주로 '배꽃 필 때 빚는다'고 해서 이화주(梨花酒)라고 불린다.
예술에서 만드는 이화주인 '배꽃 필 무렵'은 잣 잎 추출물로 구멍떡을 반죽해 빚는 14도짜리 술이다.
마치 요구르트처럼 새콤달콤해 식욕을 돋우는 애피타이저로도, 입안을 마무리하는 디저트로도 손색없을 것 같다.
백암산 자락 1만6천여㎡의 대지에 자리 잡은 전통주조 예술은 술 빚는 양온소와 누룩 제조실뿐만 아니라 각종 실습과 시음이 이뤄지는 80평 규모의 우리술 문화체험관과 게스트하우스까지 갖추고 있다.
체험관에서는 전통 소주 내리기, 모주 만들기, 전통주 빚기 등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경험할 수 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하룻밤 묵으며 전통주 강의를 듣고 술 빚기 체험을 할 수 있는 1박 2일 프로그램도 운영된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0년 4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