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팽개쳐진 자유무역…곳곳 마스크·식량 수출 '빗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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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방어' 新보호주의 촉발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지난 2월 중국 외 지역으로 번지자 각국 정부는 일제히 마스크 수출을 제한하기 시작했다. 수출규제는 장갑과 방역복 등 개인용 보호장비부터 의약품까지 확산됐다. 글로벌 확진자 수가 50만 명을 넘어선 3월 하순이 되자 식량 수출을 제한하는 국가도 나타났다. 코로나19가 ‘신(新)보호주의’를 촉발한 것이다.
EU, 의료용품 역외 유출 금지
인도, 치료제 후보물질 수출 중단
세계보건기구(WHO)를 비롯한 많은 전문가가 자유무역을 코로나19 확산을 방지하기 위한 핵심으로 꼽았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대만, 인도, 한국, 독일 등 자유무역을 발판으로 성장을 이룬 국가들마저 전례없는 위기 속에 의료용품 수출에 빗장을 걸었다. 제러드 베이커 전 월스트리트저널 편집장은 “자국민 보호라는 가장 기본적 의무 앞에서 ‘지구촌 한 마을’은 이상론이 됐다”고 했다.
유럽연합(EU)은 지난달 15일 마스크, 장갑, 보호안경, 보호복 등 의료용품의 역외 수출 금지를 결의했다. 지난달 말에는 세계 최대 복제약(제네릭) 제조국인 인도가 코로나19 치료제 후보인 하이드록시클로로퀸을 비롯한 26종의 의약품 수출을 중단했다. 이는 미국과 유럽 소비자의 의약품 사재기 광풍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식량 수출 제한도 이어졌다. 인도, 태국에 이어 세계 3위 쌀 수출국인 베트남은 쌀 수출량을 작년의 40% 수준으로 줄였다. 옛 소련권 국가들의 경제연합체인 유라시아경제연합(EAEU) 회원 5개국은 지난 12일부터 회원국 외 국가에 대한 식량 수출을 오는 6월 말까지 한시적으로 금지했다.이 같은 보호주의 추세는 코로나19가 사그라들더라도 상당 기간 지속될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세계 교역량은 2018년 19조5222억달러에서 지난해 18조6940억달러로 4%가량 감소했다. 이미 반(反)세계화가 시작됐다는 얘기다. 세계 교역량 감소의 주요 원인으로 꼽히는 미·중 무역분쟁은 올 1월 1단계 합의에 도달했지만 이행 여부에 따라 언제든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올해 재선을 위해 중국과의 2단계 합의 과정에서 보조금, 국유기업, 사이버보안 등의 이슈를 제기하면서 정치적 입지를 다질 전망이다. 그는 EU, 영국 등과의 새로운 무역협정, 세계무역기구(WTO) 개혁도 목표로 내걸었다.
코로나19 진원지인 중국의 공업도시 우한이 봉쇄되면서 세계 완성차업체들이 부품 조달에 애를 먹었다. 이탈리아는 자국 내 마스크 생산시설이 없어 홍역을 치렀다. 사이먼 에버넷 스위스 세인트갈렌대 국제무역학 교수는 “코로나19가 글로벌 분업화보다는 자국 내 공급 사슬을 일정 수준으로 유지해야 한다는 인식을 심어주고 있다”고 진단했다.신보호주의는 글로벌 증시 폭락을 틈탄 중국의 해외 기업 인수합병(M&A)에 대한 경계로도 나타나고 있다. EU 집행위원회는 EU 외 지역의 정부가 소유했거나 지원하는 기업이 유럽 기업보다 부당하게 유리한 조건에서 M&A를 강행하는 것을 제한하는 법안을 6월께 내놓을 계획이다. 인도도 국경을 맞댄 나라가 인도 기업에 투자하려면 의무적으로 인도 정부의 승인을 받아야 하도록 외국인 투자 규정을 개정했다.
전문가들은 보호주의의 득세가 인류 번영에 커다란 장애가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미 재무장관을 지낸 헨리 폴슨 폴슨연구소 소장은 “경제회복은 미국과 중국, 유럽 등 거대 경제주체 간 협력 없이는 불가능하다. 자유무역이 완전한 것은 아니지만 보호무역은 더욱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강현우 기자 h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