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첫 마이너스 유가에 증권사·투자자 '멘붕'

"경제활동 재개돼야 안정"
WTI 5월물 -40달러까지 떨어져…전례없는 수준
증권사 HTS, 원유선물 마이너스 가격 인식 못 해
사진=AP=연합뉴스.
미국산 원유 가격이 역사상 처음으로 마이너스(-)로 떨어졌다. 전례 없는 수준의 가격에 투자자들을 충격에 휩싸였고, 증권사 홈트레이딩시스템(HTS)까지 먹통이 됐다. 당분가 저유가가 불가피한 가운데 경제활동 재개가 현실화돼야 유가가 안정을 찾을 것이란 분석이다.

◆ 국제유가, 사상 첫 마이너스간밤 뉴욕상업거래소에서 서부 텍사스산 원유(WTI)의 5월물 가격은 -37.63달러에 거래를 마쳤다. 국제유가가 마이너스로 떨어진 것은 역사상 처음이다. '-37달러'라는 수치 자체도 전례 없는 수준이다. 장중 최저치는 -40.32달러였다. 이는 1배럴의 원유를 사서 가져가면, 되레 40달러를 주겠다는 의미다.

WTI 5월물의 폭락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인한 석유 수요 급감과 원유선물 시장의 만기까지 겹친 탓이란 해석이다.

심혜진 삼성증권 연구원은 21일 "WTI 5월물 가격 급락은 추가적인 석유시장 수급 악재로 발생한 것이라기보다는 월물 교체 이벤트에 따른 변동성 확대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며 "재고 급증으로 보관 운송 비용도 상승한 상황이기 때문에 실물 인수 외 방법으로 결제가 이뤄지면서 근월물 가격 변동성이 확대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현재 원유저장고를 포함해 바다 위의 유조선도 원유 재고가 넘쳐나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 에너지정보청(EIA)에 따르면 미국의 원유 재고는 지난주 2000만배럴 가까이 늘었다. 1100만배럴 증가를 예상한 전문가들의 눈높이를 웃도는 수준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원유 시장이 점차 안정을 찾을 것으로 봤다. 주요 산유국의 감산으로 증산 우려가 일부 해소됐고, 주요국의 경제활동 재개가 기대되서다.

심수빈 키움증권 연구원은 "코로나19로 인해 수요개선 기대가 약한 만큼 저유가 흐름은 상반기 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며 "그러나 5월 중 주요국의 경제활동 재개가 기대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유가하락 압력은 완화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 증권사 HTS 먹통

유가가 전례 없이 마이너스(-)를 기록하면서 증권사 거래 시스템에도 문제가 발생했다. 일부 증권사의 원유선물을 사고파는 홈트레이딩시스템(HTS)이 원유선물 가격 마이너스를 인식하지 못하면서다.

키움증권 HTS에서는 마이너스를 기록한 국제유가를 인식하지 못해 WTI 선물 거래가 멈추는 일이 발생했다. 매매가 멈추면서 원유선물 투자자들은 최근 월물을 팔고 차근 월물을 매수하는 롤오버(월물교체)나 매도 청산을 하지 못했다. 거래 정지로 인해 손실을 입었다는 고객들의 항의가 나오는 상황이다.통상 선물가격이 하락해 고객 계좌의 평가액이 증거금보다 낮아지면 증권사에서는 추가 증거금을 요구하는 마진콜(margin call)을 보낸다. 이 때 정해진 시간까지 증거금을 예탁하지 못하면 증권사가 임의로 반대매매를 시행하는 캐시콜이 발생한다.

키움증권 관계자는 "이날 새벽 3시9분부터 장이 끝나는 3시30분까지 오류가 발생한 것으로 확인됐다"며 "피해 고객들과 연락을 해 피해 규모와 보상에 대해 협의 중"이라고 설명했다.

키움증권 외에도 하나금융투자 대신증권 교보증권 이베스트투자증권 등의 HTS에서 원유선물 마이너스 가격을 인식하지 못했다. 다만 이들 증권사의 원유선물 투자자들은 가격이 마이너스가 되기 전 청산을 완료해 HTS 오류로 인한 피해는 없었다.

금융감독원은 원유선물과 관련해 증권사 HTS 오류로 인한 피해 상황을 파악 중이다.

◆국제유가 폭락하는 데 기름값은 1% 하락

국제유가가 역대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지만 주유소에서 파는 기름값의 하락세는 더디기만 하다. 이날 오전 국내 주유소 휘발유값 평균은 리터(L)당 1306원으로 지난 17일(1318원) 대비 12원(0.9%) 하락했다. 국제 유가는 300% 넘게 떨어졌는데 국내 기름값은 1% 하락에 그친 셈이다.

전문가들과 정유업계는 "기름값의 60%가 세금이기 때문에 국제유가 대비 등락폭이 제한된다"고 설명했다. 또 정유사들이 중동에서 원유를 구입해 국내까지 운송하는 데 2~3주 가량이 소요되기 때문에 시차도 발생한다고 했다.

조상범 대한석유협회 팀장은 "국내 기름값에는 리터당 교통세 교육세 주행세 부가세 등 60%가량의 세금이 포함된다"며 "세금 비중이 높은 만큼 국제유가 하락폭이 전부 반영되기 어려운 구조"라고 말했다.

기름을 수입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도 국제 유가 하락이 즉각 반영되는 데 걸림돌로 작용한다. 정유사들이 원유를 구입해 배로 선적 옮겨오는 데는 2~3주 가량이 걸린다. 여기에 개별 주유소들이 주로 한 번에 1~2주 판매량을 들여오기 때문에 재고가 소진되기 전까지 국제유가 하락분이 반영되는 건 쉽지 않다.환율이 급등한 것도 국내 기름값 하락을 막는 원인이다. 정유사들은 원유를 수입할 때 미국 달러화로 사오는데 환율이 급등하면서 지급해야 할 원화가 늘었다. 환차손을 상쇄하기 위해서는 국내 기름값을 큰 폭으로 내릴 수 없는 것이다. 실제 지난 2월까지 1100원대에 머물던 원·달러 환율은 지난달 1200원대로 치솟았으며, 이날은 장중 1240.9원까지 올랐다.

채선희/차은지/윤진우 한경닷컴 기자 csun0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