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 잃은 청춘에게 꿈 향한 열정 찾아주고 싶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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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 신춘문예 당선작 'GV 빌런 고태경' 출간한 정대건 씨“요즘 20~30대 청춘들은 유독 자기 자신에게 가혹한 것 같아요. 꿈을 좇다 안 되면, 좀처럼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면 자신이 사랑하는 것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미워합니다. 소설을 통해 이 시대 젊은이들이 세상의 기준에 맞는 성공과 실패를 떠나 자기가 진정 꿈꾸는 것에 애정을 갖길 바랐습니다.”
흥행 실패 겪은 30대 여성 감독
'50대 투덜이' 다큐멘터리 찍으며
변화하는 삶의 과정 사실적 묘사
2020년 한경 신춘문예 장편소설 부문 당선작 《GV 빌런 고태경》(은행나무)이 지난 20일 단행본으로 출간됐다. 21일 서울 합정동 한 카페에서 만난 작가 정대건 씨(34)는 “지금 사회가 그럴 여유를 주진 않지만 작품을 기다리는 영화감독이든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이든 자기 목소리와 욕망에 귀를 기울여봤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소설을 썼다”고 말했다.소설 제목에서 GV는 ‘관객과의 대화(guest visit)’를 의미한다. ‘빌런’은 악당이란 뜻이다. ‘GV 빌런’은 영화 시사회 후 ‘관객과의 대화’에서 이상하고 무례한 질문으로 분위기를 흐리는 관객을 말한다.
소설은 처음 연출한 장편영화가 처참한 성적을 낸 뒤 스스로를 실패자로 여기는 서른세 살 여성 영화감독 조혜나가 우연히 참석한 ‘관객과의 대화(GV)’에서 자신의 작품을 공격하는 50대 늦깎이 영화감독 지망생 고태경과 만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혜나는 GV 시간 내내 자기 영화를 까칠하게 지적한 고태경에게 다소 불순한 의도를 품고 다가간다. 고태경에게 그의 삶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겠다고 하면서 출연을 제안한다.
혜나가 출연을 고사하던 고태경을 어렵게 설득한 뒤 그의 모습을 영상에 담기 위해 매일 함께 다니며 벌이는 모습은 ‘버디 무비’(두 사람의 우정을 다룬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고태경이 괘씸해 그의 삶을 희화화하려는 의도로 다큐멘터리 촬영을 시작했지만 점차 고태경의 말과 행동이 모두 영화에 대한 열정과 관심으로 이어져 있다는 걸 혜나는 깨닫는다. 혜나의 마음은 망신주기에서 연민으로, 마지막엔 응원으로 바뀐다.“고태경은 굉장히 복합적인 인물이에요. 고지식한 듯 보이지만 영화에 대한 말하지 못할 사연과 슬픔이 있죠.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은 아니더라도 꾸준히 뭔가를 열심히 준비하고 노력하는 사람의 전형이에요. 고태경을 통해 수많은 불운에도 불구하고 꿈을 향해 묵묵히 나아가려는 의지를 지닌 인물의 전형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소설엔 작가 자신의 경험이 녹아 있다. 정씨는 고려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 영화 연출을 전공했다. 다큐멘터리 ‘투 올드 힙합 키드’와 극영화 ‘사브라’ ‘메이트’를 연출했다. 이 작품의 독특한 점은 남성 작가가 여성 화자를 내세웠다는 것이다. 손정수 문학평론가는 “소설이 실제 작가의 이야기라는 생각으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서술 구도 변화 덕분에 작가 자신의 경험을 투영하면서도 그에 따른 긴장에 휘말리지 않을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작가는 “좌절하고 열망하는 것, 연인과의 관계에서 생긴 상처에 슬퍼하는 감정에는 성별이 없다고 생각했다”며 “저와 소설 속 화자 사이 거리를 두기에도, 섬세한 감정의 결을 담기에도 여성의 목소리가 더 적절하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이 작품은 영화 촬영 현장의 이면 등 그동안 한국 문학에서 흔하게 나오지 않던 이야기를 소재로 삼았다. 정씨는 “영화학교에 들어가 영화를 찍고 관찰하면서 영화 현장이라는 매력적인 생태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기록하고 싶었다”고 말했다.고태경을 만나 갖가지 사건이 일어나면서 혜나는 변화를 겪는다. 혜나는 “벌어지지 않은 일을 기대하며 품게 되는 행복보다 지금 내가 느끼고 있고 손에 잡히는 행복에 집중하는 것”이라며 “누군가 나를 눈여겨보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스스로 귀하게 여기도록 만든다”고 되뇐다.
“영화감독과 영상연출자들은 다음 작업을 이어갈 기회가 주어지길 절실히 원해요. 영화든 취업이든 그런 기회가 생기려면 누군가 자신을 알아봐줘야 합니다. 그 ‘알아봐줌’이 현재 자신에게 자극과 의욕을 주고 현재를 살 힘을 준다는 걸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은정진 기자 silv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