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장폐지 위기 내몰린 원유 ETN…2조 베팅한 개미 '피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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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버리지 ETN, 유가 전일대비 50% 하락 땐 상장폐지지난 21일 서부텍사스원유(WTI) 6월 인도분이 43% 폭락했다. 장중에는 하락률이 60%를 넘기도 했다. 22일 아침 눈을 뜬 원유 레버리지 상장지수증권(ETN) 투자자들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만일 종가가 7%포인트 더 하락했다면 투자자산을 모두 날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국내에 상장된 WTI 원유를 기초자산으로 하는 모든 레버리지 상품은 유가가 50% 하락하면 상장폐지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WTI 5월물 값 마이너스 이어
6월물마저 급락하자 시장 '공포'
지표가치-시장가 괴리 너무 커져
ETN 유동성 공급하는 증권사
"수습할 수 없는 지경" 두 손 들어
금융당국은 유가 변동성이 극심해지면서 관련 상품 투자자의 전액 손실과 상장폐지 가능성을 경고하고 있다.원유 상품에만 7조원 투자한 개미들
한국거래소에 상장된 원유 관련 ETN과 ETF 등 상장지수상품(ETP)은 총 18개다. 브렌트유 가격을 따라가는 2개 상품을 제외하면 모두 WTI 선물을 기초자산으로 삼는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과 산유국 간 감산 합의 무산으로 국제 유가가 단기간에 급락하자 개인투자자가 이 상품으로 몰렸다. 올 들어 개인은 국내에서 원유 ETP 2조3712억원어치를 순매수했다. 원유 관련 인덱스 펀드로 유입된 설정액도 4조7446억원에 달했다. 유가 상승에 베팅한 자금만 7조원대에 이르는 셈이다.
지난 20일 WTI 5월물 가격이 사상 처음 마이너스를 기록했을 때도 전문가들은 크게 우려하지 않았다. 21일 만기를 하루 앞두고 일시적으로 변동성이 확대된 결과라는 설명이 나왔다. 국내 ETN 상품들은 이미 6월물로 기초자산을 롤오버(근월물 만기가 오기 전에 원월물로 교체하는 것)한 터라 가격에 큰 타격이 없었다.만기 많이 남은 6월물 하락 우려
하지만 다음달 19일이 만기인 6월물마저 급락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부분 손실을 넘어 상품 청산 및 상장폐지 가능성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ETP 상품은 기초자산(원유)의 수익률을 따라가기 위해 관련 선물 등에 투자한다. 매일 대금을 지불하며 자산을 유지한다. 하지만 지표가치가 0 아래(유가 마이너스)로 떨어지면 자산가치를 유지할 수 없게 된다. 상장이 어려운 상태를 말한다.
이런 우려가 현실이 될 가능성은 적지 않다. WTI 6월물도 마이너스로 떨어질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롤오버 기간(5월 7~14일) 이전에 0 아래로 떨어지면 이를 기초자산으로 삼은 모든 ETN과 ETF의 지표가치는 0이 돼 청산 및 상장폐지 대상이 된다. 기초자산 하루 가격 변동을 두 배로 추적하는 레버리지 상품은 50%만 떨어져도 상장폐지가 불가피하다. 유가가 10달러라고 가정하면 거래가 5달러로 끝나면 모든 레버리지 ETN이 거래 정지되고 청산 절차를 밟는다는 얘기다. 유가와 반대로 움직이는 인버스 상품도 마찬가지다. 유가가 15달러가 되면 유가 하락에 베팅하는 인버스 레버리지 ETN도 투자금 전액을 잃는다.괴리율 축소도 어려워
증권사가 유동성을 공급해 괴리율을 줄이는 것도 쉽지 않다. 평소 증권사는 ETN의 시장가격을 지표가치와 맞추는 유동성공급자(LP) 역할을 한다. 원유선물 1만원어치를 담고 있는 ETN이 이보다 비싸게 거래되고 있으면 공급량을 늘려 주가를 떨어뜨리고, 싸게 거래되면 매수해 주가를 올린다. 시장가격이 1만원 인근에서 형성되도록 한다.
하지만 최근 괴리율을 조절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거래소 규정에 따르면 증권사는 지표가치(원유 선물가)의 ±6% 내에서만 ETN 호가를 낼 수 있다. 동시에 모든 상장 종목은 시장가격의 ±30% 범위 내(레버리지 상품은 ±60%)에서 호가를 낼 수 있다. 지표가치가 너무 떨어지고 시장가격이 너무 높아져 두 범위의 접점이 없어지면 LP의 호가 제출이 불가능하다.22일 신한금융투자는 이런 문제 때문에 ETN 신규 물량을 시장에 풀지 못했다. 지난 21일에는 1조300억원어치(액면가 기준)를 공급했으나 유가 폭락으로 괴리율이 더 벌어져 아예 손을 놓았다. 삼성증권도 최대 2조원의 신규 물량을 상장할 수 있게 됐지만 보류했다.
개인투자자 손실이 우려되는 상황이 다가오자 금융당국은 투자자 말리기에 나섰다. 금융감독원은 지난 9일 레버리지 원유선물 ETN에 대해 가장 높은 등급인 ‘위험’ 소비자경보를 발령했다. 이는 금감원이 소비자경보 제도를 도입한 2012년 이후 처음이다. 한국거래소는 24일까지 WTI 원유선물을 기초자산으로 한 ETN 2종목에 대해 거래를 정지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 상장지수증권(ETN)원자재나 주가지수 등 기초자산의 가격 변동에 따라 수익을 얻을 수 있도록 설계한 채권 형태의 상품. 거래소에 상장돼 자유롭게 사고팔 수 있다. 상장지수펀드(ETF)와 비슷하지만 자산운용사가 아니라 증권사가 발행한다. ETF와 ETN을 통틀어 상장지수상품(ETP)이라고 부른다.
전범진/양병훈 기자 forwar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