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용의 글로벌시대] '서유견문' 간행 125주년과 'K방역'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 사람답게 사는 권리는 현명함과 우둔함, 귀함과 천함, 가난함과 부유함, 강함과 약함에 따라 구별되지 않는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이치는 천자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털끝만큼의 차이도 없다. …사람 위에도 사람이 없고 사람 아래에도 사람이 없다"
'서유견문'(西遊見聞) 제4편 '국민의 권리'의 한 대목이다.

지금에야 상식이 됐지만 반상(班常)의 구별이 엄격하고 신분의 귀천이 뚜렷한 조선시대에서는 큰 파문을 일으킬 폭탄 발언이었다.

유길준은 1889년 집필을 마치고 1895년 4월 25일(음력 4월 1일) 일본에서 책으로 펴냈으니 '서유견문' 간행 125주년을 맞는다.
유길준은 1856년 서울 북촌 양반가 자손으로 태어나 1873년 박규수 문하에서 배웠다.

박규수의 조부가 청나라 견문록 '열하일기'(熱河日記)를 쓴 박지원이니 그의 학풍과 저술이 1세기의 시차를 두고 영향을 끼친 셈이다.

개화사상에 심취한 유길준은 과거제의 폐해를 깨닫고 과거 시험도 포기했다. 1876년 일본에 개항한 조선은 1881년 일명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 즉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을 일본에 파견했다.

유길준은 어윤중의 수행원으로 발탁돼 동행했다가 일본의 개화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가 세운 게이오(慶應)의숙에 입학해 최초의 일본 유학생이 됐다.
1883년에는 외교사절단 보빙사(報聘使) 단원으로 뽑혀 미국으로 건너가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 됐다. 피바디에섹스박물관의 에드워드 모스 관장의 개인지도를 거쳐 1884년 9월 명문 고교인 더머아카데미 3학년으로 편입했다.

현지 풍습에 맞게 머리를 짧게 자르고 한복을 벗어 던졌는데 당시 기증한 갓, 도포, 저고리, 바지, 부채 등은 지금도 피바디박물관에서 소장되고 있다.

그러나 1884년 갑신정변이 터져 학업을 이어가지 못했다.

학비 지원이 끊긴 탓도 있지만 주모자나 피해자 모두 유길준과 가까웠기 때문이다.

1885년 6월 귀국길에 오른 그는 태평양 대신 대서양을 건너 유럽 각국을 돌아본 뒤 수에즈운하, 싱가포르, 홍콩, 일본을 거쳐 1885년 12월 제물포항에 도착했다.
서울로 올라오던 중 체포돼 포도청에 갇혔다가 포도대장 한규설 집과 보빙사 정사였던 민영익의 별장에서 연금 생활을 했다.

이곳에서 완성한 책이 최초의 국제인문지리서이자 국한문 혼용체의 효시인 '서유견문'이다.

한규설이 고종에게 원고를 전달했으나 관심을 받지 못했다.

책은 외면받았어도 책에 적은 뜻을 펼칠 기회가 왔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계기로 일본이 개입해 갑오경장이 시작되자 유길준은 실권자로 부상했다.

노비제 폐지, 양력 채택, 과거제 폐지, 은본위제 도입, 군국기무처 설치 등의 개혁 조치가 유길준의 손에서 입안됐다.

단발령이 내려지자 왕세자의 상투를 직접 잘랐다.

'서유견문'도 이 무렵 일본 고준샤(交詢社)에서 출간됐다.
그러나 권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1896년 아관파천으로 친러파가 득세하자 유길준은 일본으로 망명하고 '서유견문'도 금서로 묶였다.

그곳에서도 '프러시아 프리드리히대왕 7년 전사(戰史)', '크리미아 전사', '이태리 독립전사' 등을 번역 출간하며 부국강병의 길을 알리려 힘썼다.

1907년 순종 등극과 함께 귀국했으나 벼슬 제의를 거절한 채 학교 설립, 자치회 조직, 국어문법서 '대한문전'(大韓文典) 간행 등에 매달렸다.

유길준은 일본의 힘을 빌려 개화와 자립을 모색한 친일파지만 한일합병에는 반대했다.

1910년 경술국치 후에 일제가 조선 고관들에게 작위를 수여하려 하자 한규설 등과 함께 거절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자치권 확보에 노력하다가 1914년 9월 30일 눈을 감았다.

그는 "평생 아무런 공도 이룬 것이 없으니 묘비를 세우지 마라"는 유언을 남겼다.

경기도 하남시 검단산 기슭의 묘소에는 공적비는 없고 성명과 생몰 연도를 적은 작은 비석만 서 있다.
서유견문은 574쪽 20편으로 구성됐다.

1편과 2편에서는 지구 세계의 개론, 6대주의 구역, 나라의 구별, 세계의 산·바다·강·호수·인종·물산 등을 설명해놓았다.

3∼14편에서는 나라와 국민의 권리, 정부의 정치제도, 세금 거두는 법규, 교육·군대·경찰·법률·금융 제도, 서양 학문의 내력 등을 기술했다.

16편부터 20편까지를 각국 풍속 해설과 주요 도시 탐방기 등으로 꾸몄다.

1866년 후쿠자와 유키치가 펴낸 '서양사정'(西洋事情)을 모방했다고 깎아내리는 사람도 있으나 당시 한국인의 식견에 비춰볼 때 파격적이고 탁월한 저작으로 평가할 만하다.

그가 서문에서 밝힌 대로 "기록하기 쉽고 알기 쉽게" 한글로 쓴 것도 시대를 앞서간 결정이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발걸음이 너무 느린 탓인지 '서유견문'과 '서양사정'의 행로는 판이했고 조선과 일본의 운명도 엇갈렸다.

'서양사정'은 15만 부 넘게 팔려나간 반면 '서유견문'은 1천 부만 찍어 지인들에게 무료로 배포됐다.

벼슬아치들은 국한문 혼용체가 "문장가의 궤도를 벗어났다"며 거들떠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서유견문'에는 유길준이 서양의 제도와 발전상을 찬탄하고 부러워하는 대목이 자주 등장한다.

"여러 나라 가운데 영국의 정치체제가 가장 훌륭하고 잘 갖춰져 있어 세계 제일로 꼽힌다.

세금과 정령을 의논하는 대신은 선거로 임명하는데 이는 국민들이 함께 다스린다는 의도가 있는 것이다"(5편), "병원 치료를 받는 자가 극빈하면 비용을 내지 않지만 조금이라도 재산이 있으면 집안 형편에 따라 치료비나 약값을 낸다.

서양 대도시에는 병원이 세워지지 않은 곳이 없으며 프랑스 병원이 가장 좋다고 한다"(17편)
그로부터 100여 년이 지난 지금 세상은 급속도로 바뀌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지구를 덮치자 그동안 선진국이자 강대국으로 꼽히던 미국·영국·프랑스·독일·일본·이탈리아 등이 충격과 혼란에 빠졌다.

반면 광복 이후 이들을 좇아 열심히 달려왔던 한국이 이제는 모범 방역국으로 우뚝 섰다.

선후진국 할 것 없이 투명하면서도 민주적인 한국의 대응 시스템을 따라 하려 하고 있으며 진단 도구와 의료·위생용품 수입에 열을 올리고 있다.

대응 경험과 기술을 공유하자는 요청과 각국 언론의 찬사도 쏟아진다.

K팝, K드라마, K푸드에 이어 K방역이 새로운 한류 트렌드로 떠오르는 것이다.

만일 유길준이 이 광경을 본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자못 궁금하다. (한민족센터 고문)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