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계기로 '반전 드라마' 쓴 한일합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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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초 수출 1억弗 신화한일합섬은 한때 한국 경제개발의 상징 같은 회사였다. 1964년 창사 후 1970년 1000만달러어치를 수출해 금탑산업훈장을 받은 데 이어 1973년에는 단일 기업 최초로 수출 1억달러를 돌파한 수출 주역이었다. 1995년 재계 서열 27위까지 오른 한일그룹의 모(母)기업으로 국내 섬유 원사 시장의 40% 이상을 차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국내 섬유산업 쇠락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질 위기를 맞기도 했다. 무리한 확장 경영으로 2000년과 2013년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를 겪으면서다.
두차례 법정관리 딛고 재기
마스크용 부직포 매출
코로나 이후 5.4배 증가
이 같은 영욕의 세월을 겪은 한일합섬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반전의 드라마를 쓰고 있다. 지난 2월 업계 최초로 항균 기능을 넣은 마스크용 부직포를 출시하고, 최근 방호복용 부직포 공급 확대에 나서면서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는 평가가 나온다.마스크 부직포로 도약 발판
유진그룹 산하 동양 자회사로 편입된 한일합섬은 토종 기업으로는 최대 마스크용 부직포 생산업체다. 26일 동양에 따르면 한일합섬의 3월 마스크 관련 부직포 매출은 1월에 비해 5.4배로 증가했다. 코로나19 사태로 마스크 수요가 폭증하자 자동차 내장재에 들어가는 부직포 물량을 마스크용으로 전환했을 정도다. 24시간 3교대로 가동되는 한일합섬 경남 의령 공장에선 하루 400만 장의 마스크를 제작할 수 있는 분량의 부직포를 생산하고 있다. 최근 유진그룹 지원에 힘입어 관련 생산설비 증설을 검토하기로 했다.시중에 유통되는 일회용 마스크 5장 중 1장은 한일합섬이 생산한 부직포가 들어간다. 국내 마스크용 부직포 시장은 일본계 화학소재 업체인 도레이첨단소재가 60%, 한일합섬이 20%를 차지하고 있다. 나머지 시장은 대명, UPC, 락커, 크린손 등 중소기업 5곳이 나눠 갖고 있다.
정용식 한일합섬 의령공장장(상무)은 “최근 중국 업체로부터 마스크 1억 장(1500억원어치)을 만들 수 있는 분량의 부직포를 납품해달라는 제안을 받았지만 거절했다”고 말했다. 국내 시장의 안정적 공급을 위해서다. 한일합섬의 연간 매출은 1400억원대로 부직포 관련 매출 비중은 15~20% 수준이다.
위기 극복 비결은 절박함
한일합섬의 부활은 단순히 코로나19 때문만은 아니다. 두 차례 법정관리를 겪으며 어느 기업보다 원가 절감과 기술개발에 절실하게 노력한 끝에 위기에 강한 체질로 바꿔 기회를 잡았다는 게 업계 분석이다.
한일합섬은 한일그룹(1964~2006년)에서 동양그룹(2007~2015년), 유진그룹(2016년 이후) 등으로 두 차례 주인이 바뀌면서 20년간 혹독한 구조조정 시기를 거쳤다. 노사가 합의해 임금을 20~30% 반납하기도 했다. 중국과의 가격 경쟁에 밀려 고전하던 원료사업부, 침장사업부, 패션사업부 등은 과감히 정리했다. 두 차례 법정관리를 거치면서 300~400여 명의 직원이 회사를 떠나는 아픔도 겪었다. 대신 고부가가치 특수·기능성 섬유에 역량을 집중했다.현재 한일합섬은 스웨터, 코트, 머플러 등에 쓰이는 아크릴원사 부문에선 높은 품질을 바탕으로 국내 시장의 60~70%를 점유하고 있다. 마스크, 방호복, 자동차 내장재 등에 쓰이는 부직포를 비롯해 유아 침구류, 병원용품에 쓰이는 항균 기능성 섬유와 반도체 작업복, 군용품 등에 쓰이는 전자파·정전기 방지 프리미엄 원사 등에서도 경쟁력을 인정받고 있다.
발빠른 기술 개발도 위기 속에서 한일합섬이 체득한 생존 비결이다. 한일합섬은 부직포 주문이 밀려드는 와중에도 지난 2월 항균 기능을 넣은 마스크용 부직포를 업계 최초로 출시했다. 이인수 한일합섬 대표는 “두 차례 법정관리를 거치면서 이대로 무너질 순 없다는 절박함이 쉼 없는 기술개발 문화를 만들었다”고 했다.
한일합섬은 최근 코로나19 사태로 수요가 급증한 방호복의 겉감에 들어가는 부직포 공급도 확대하고 있다. 지난달 방호복 관련 부직포 매출이 전년 동월 대비 400~500%로 늘었다는 전언이다. 이 대표는 “과거의 명성을 회복할 수 있도록 연구개발 기업으로 도약할 것”이라고 강조했다.과거 한일합섬은 그룹내 매각 대상 1순위로 거론되는 계열사였다. 2013년 당시 동양그룹은 한일합섬의 부직포사업을 200억원에 도레이첨단소재에 매각하는 방안과, 나머지 사업부문을 KBI그룹(옛 갑을상사그룹)에 매각하는 방안을 타진했지만 무산됐다. 2016년 유진그룹이 ㈜동양을 인수할때도 주력사업(레미콘)과 시너지가 없다는 점 때문에 한일합섬 미래를 불투명하게 보는 인수·합병(M&A) 전문가가 많았다. 하지만 유진그룹은 한일합섬을 팔지 않기로 하고, 정진학 ㈜동양 사장 주도로 내실을 다진 후 2018년 분사시켜 책임경영 체제를 확립시켰다. 정 상무는 “유진그룹에 인수된 후 빠른 의사결정과 실무자의 의견을 중시하는 바텀업 방식(상향식)의 소통 문화가 회사에 긍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안대규 기자 powerzani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