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과거 복원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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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A22
이호원 < 대한상사중재원 원장 hwlee@kcab.or.kr >평생을 분쟁 해결 업무에 종사하면서 살아온 내게 가장 중요한 업무 중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코 ‘과거 복원 작업’이다. 법률가는 주로 전문 법률지식만을 다룬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분쟁에서 실제로 문제가 되는 것은 3분의 2 이상이 사실에 관한 것이다. 과거에 있었던 사실을 올바르게 복원하는 작업이 주된 과제이기 때문이다.
민사분쟁의 경우 과거 사실에 대해 당사자들의 주장이 엇갈려서 다툼이 생긴다. 이 같은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선 누군가 주장하는 과거의 사실관계가 실제로 존재했던 사실관계에 부합하는지를 판단하는 작업이 관건이다. 법률 문제라기보다는 사실 문제인 것이다.이런 분쟁 해결업무를 담당하는 법률가에겐 법률 지식 못지않게 과거를 올바르게 재구성해 진실을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학교에선 법률 조항을 가르칠 수는 있으나, 상반되는 당사자의 주장 가운데 누구의 주장이 옳은지를 판별하는 방법까지 가르쳐주지 않는다. 법률가라고 해서 과거 복원 능력을 충분히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없는 이유다. 사람들의 삶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상식에 기반한 올바른 판단 능력을 배양하는 한편 다양한 사안을 다뤄 본 경험이 축적되는 과정을 통해서만 과거 복원 능력을 갖출 수 있다.
형사사건은 민사사건보다 과거 복원 작업이 더더욱 중요하다. 대부분 형사사건은 피고인의 행위, 예컨대 살인이나 절도 행위가 법률에 위반되는지보다는 피고인이 실제로 살인 혹은 절도를 저질렀는지 과거 사실의 존재 여부가 핵심이다.
과거 복원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되는 것은 문서와 증언이다. 문서는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는 고정적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과거 복원 작업에서 변하지 않는 좌표를 제시한다. 그러나 과거 특정 시점에 있던 사실이 어떻게 현재 상태까지 이르렀는지를 설명하는 데는 충분할 수 없다. 이에 문서만을 보고 모든 사건의 줄거리를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줄거리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증언, 즉 사람의 말이 필요하다. 사람의 말은 문서와 달리 고정돼 있지 않다. 증언은 상황과 말하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수시로 변할 수 있다는 큰 단점이 있다.과거 복원 작업은 마치 바다에 따로 떠 있는 섬과 같은 문서를 디딤돌 삼아 진실이라는 목적항까지 운행하는 길을 찾아내는 작업과 같다. 또 이처럼 별개로 존재하는 섬과 섬, 섬과 목적지를 연결하는 항로를 증언을 통해 제시받는 느낌이다. 올바른 과거 복원 작업은 각기 다른 증언 중에서 어느 것이 가장 올바른 목적항으로 인도하는가를 알아내는 작업이다.
불완전한 인간들에 의해 이 모든 과정이 진행되기 때문에 어느 사건에서나 오로지 진실한 과거 복원만이 이뤄진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것이 당연한 법률가의 숙명이라고 여기고, 나는 오늘도 최선을 다해 그 항로를 찾아 일상을 묵묵히 헤쳐나가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