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 빼앗기고 이역만리에 버려진 고려인들의 비망록

김숨, 1년9개월만에 장편소설 '떠도는 땅' 출간

농경사회였던 20세기 초만 해도 사람들에게 '땅'은 모든 것이었다. 단순히 집을 지을 공간을 넘어 식구가 연명할 작물을 일궈내야 하는 생존의 터전이자 희망의 원천이었다.

'땅'을 빼앗긴다는 것은 삶의 기반을 송두리째 잃는 것이어서 목숨을 내놓으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1937년 소련 '극동 지역'에 살던 고려인 17만여명은 어느 날 갑자기 이런 일을 당했다. 조선 말기 지주들의 착취를 피해 연해주로 건너간 이들은 황무지를 개간해 '땅'을 갖게 됐지만, 소련의 소수민족 강제 이주 정책으로 살던 땅을 잃고 이역만리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등에 강제 이주됐다.

가축을 싣는 화물열차에 태워져 시베리아를 횡단해 서쪽으로 한 달 넘게 달리는 지옥 같은 여정이다.

고려인들은 낮과 밤을 분간하기 힘든 어두운 화물칸 속에서 열악한 환경과 싸우며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끌려가야 했다. 추위와 식수, 식량 부족에 열악한 위생 상태까지 겹쳐 수백명이 사망했고, 어디인지도 모를 동토에 묻혔다.

중화사상에 빠져 국력을 스스로 갉아먹고 힘없는 민중까지 착취했던 지배층 때문에 추운 북쪽 이국으로 쫓겨가야 했던 고려인들은 사회주의 체제의 비인간적 횡포 앞에서 또다시 고통을 당한다.
등단 23주년을 맞은 김숨이 1년 9개월 만에 내놓은 장편소설 '떠도는 땅'(은행나무출판사 펴냄)은 이런 비극을 다시 불러내 재구성한다. 동굴 같은 화물칸에 탄 27명에게 하나하나 사연을 부여해 입체적 인물로 지금 우리 앞에 소개함으로써 공감을 극대화한다.

특히 국력이 약할수록 고통스러운 삶을 살게 된다는 여성과 아이들, 노인의 목소리를 통해 슬픔과 박탈감을 전한다.

다양한 사연을 지닌 사람들은 지옥 같은 고통과 상실감 속에서도 서로를 위로한다.

생명은 소중한 것이어서 쉽게 사그라지거나 잦아들지 않는다.

임신부인 주인공 금실의 시어머니는 자신이 죽거든 시체는 아무 데에나 버리더라도 자신의 저고리와 치마는 반드시 챙겨가라고 당부한다.

저고리와 치마 안쪽에 작은 주머니들을 만들어 각종 곡식과 채소 씨앗을 넣어놓았기 때문이다.

목적지 카자흐스탄에 도착한 '살아남은 자들'은 황량한 땅을 바라보며 허탈해한다.

하지만 이내 개간을 하고 땅굴집을 짓고 가정을 꾸리고 아기를 낳으며 그렇게 다시 삶을 이어간다.

윤상원 고려인연구센터 소장은 "이야기는 현재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에 사는 고려인의 150년 역사를 응축하고 있다"면서 "이 책은 디아스포라 민족인 고려인이 겪은 비극을 잊지 않게 하는 비망록"이라고 말했다.

김숨은 1997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와 1998년 문학동네신인상을 통해 등단해 장편 '철', '바느질하는 여자',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 소설집 '침대', '국수', '나는 나무를 만질 수 있을까' 등을 펴냈다. 이상문학상, 동리문학상, 현대문학상, 대산문학상 등을 받았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