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관제 민낯 드러나는 코로나지원금 기부

농협은 당사자 의사 확인도 안해
기부 강제, 소비진작 목표와 충돌

강진규 경제부 기자 josep@hankyung.com
“자발적 기부라니 저는 들어본 적도 없는데요.”

지난 5일 농협 임원과 간부급 직원 5000명이 긴급재난지원금(코로나지원금)을 자발적으로 기부하기로 했다고 발표하자 6일 한 지역농협 임원은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자신이 기부 대상이라는 사실을 몰랐으며 자발적으로 기부하기로 한 적도 없다는 것이었다.농협이 추산한 5000명에는 약 1100개 지역농협의 임원 3명과 중앙회 및 계열사, 지역본부의 간부 등이 포함된다. 하지만 당사자에게 일일이 기부 의사를 확인하는 절차는 없었던 것으로 파악됐다. 농협 관계자는 전날 기부 방침에 관한 보도자료를 내면서 5000명의 기부 대상자 중 “반대의견은 없었다”고 설명했지만 실상은 이와 달랐던 것이다.

앞서 메리츠금융그룹이 임직원 2700명의 ‘자발적 기부’를 발표했을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직원들에게 동의도 구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발표했다는 비판이 나왔다. 회사 측은 CEO 메시지를 통해 전 직원에게 알리고 노동조합과 합의한 사항이라고 해명했지만 개개인에게 직접 동의를 받진 않았다는 점을 인정했다.

두 회사는 대규모의 기부를 발 빠르게 결정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정부의 기부 독려에 회사 수뇌부가 민감하게 반응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 과정에서 실제 기부를 해야 하는 임직원의 의견은 충분히 수렴하지 못했다. 정부는 ‘자발적 기부’를 계속 강조했지만 이들이 의견 수렴까지 간소화하면서 서두른 데는 ‘관제 기부’라는 무언의 압박을 상당히 느꼈을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정부와 여당은 지난달 코로나지원금 전 국민 지급을 추진하면서 ‘자발적 기부’를 처음 언급했다. 이에 메리츠금융과 조계종이 대규모 기부를 발표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4일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단체 기부 움직임에 대해 긍정적으로 언급하자 이튿날 농협이 화답했다.

기업들의 ‘자발적 기부’ 논란은 당분간 지속될 전망이다. 중소기업을 대변하는 중소기업중앙회의 김기문 회장은 6일 “조금이나마 상황이 나은 기업을 시작으로 기부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대하겠다”고 말했다. 반면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하는 게 좋지 않겠나 생각한다”고 했다.

코로나지원금 기부가 논란이 되면서 정작 정책의 본목표는 희미해지고 있다. 코로나지원금은 애초에 생계곤란에 빠진 가계에 소비 여력을 공급해 소상공인을 돕고 경기를 활성화하려는 목적으로 기획됐다. 하지만 기부 여부가 화제의 중심이 되면서 소비 진작이라는 목표가 희석됐다는 평가다. 정부가 단체 기부를 환영하기보다 소비를 독려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