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물 먹는 소리

최현숙 < IBK캐피탈 대표이사 jaynne@ibkc.co.kr >
봄볕이 익어간다. 거리에 도열해 선 푸른 나무는 갓 입대한 청년들처럼 눈부시다. 바람의 손짓에 꽃들은 신이 나 몸을 흔든다. 하늘의 주민인 새들도 할 말이 많아졌다. 연분홍 치마를 두른 영산홍이 무더기로 피어 있는 아파트는 말 그대로 동요 속 꽃대궐이다. 밖은 온통 화사하고 앙증맞은 봄것들의 차지, 거리를 둔 인간 세상과 달리 이들의 세상은 어화둥둥 잔칫집이다.

사무실 한편에 지인이 보내온 작은 식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며칠 전 그중 한 녀석이 잎을 늘어뜨린 채 뭔가 편치 않아 보였다. 식물도 감기몸살에 걸리나? 이럴 때 나의 긴급조치는 물 처방이다. 컵에 물을 가득 채워 조심스럽게 화분에 붓기 시작했다.아! 이때 나의 귀를 감아 도는 소리. 마른 흙이 꿀꺽꿀꺽 물을 삼키는 소리였다. 식물의 목구멍으로 생명수가 넘어가는 소리였다. 비좁은 화분에 간신히 뿌리를 내리고 사는 한 생명이 내는 회생의 탄성이었다. 얼마나 목이 말랐으면, 얼마나 물이 간절했으면, 미안하고 기특한 마음에 한 컵 더 붓고 나니, 아차! 물을 너무 많이 주면 뿌리가 썩는다는 지인의 말이 퍼뜩 생각났다. 그러나 어쩌랴. 이미 쏟아부은 물. 배불리 물을 먹이고 다음날 출근하자마자 녀석에게 다가갔다. 다시 탱탱하게 일어선 자태, 싱그러운 푸른 잎. 아! 생명이란 이토록 경이롭고 고마운 것이다.

먹고사는 일에 눈과 귀가 멀어지고, 갑자기 들이닥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입까지 막아버린 올봄은 건조하고 흉흉하다. 아이들이 사라진 운동장, 사람들이 오지 않는 꽃밭은 황야나 다름없다. 봄을 바라보는 우리도 시큰둥하기는 매한가지다.

팬데믹(대유행)의 이력은 인류 역사와 함께했다. 인체는 수많은 바이러스의 침입을 통해 면역력을 키우며 생존해왔다. 이 지루하고 어두운 터널도 곧 끝이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 위기를 지나는 동안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서로의 어려움을 보살피고 마음을 보듬는 일일 것이다. 사회적 거리가 자칫 외로움을 배양하거나 생이별을 양산하지 않도록 말이다.

여리여리한 녀석이 물 먹던 소리를 잊지 못할 것이다. 휴대폰 충전줄보다도 더 얇은 몸통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시들시들하던 이파리가 하루 사이에 벌떡 일어난 마법 같은 힘이 어디서 왔는지 또한 알 수 없다. 그날 이후 매일 아침 녀석을 살펴본다. 행여 또 아프지 않을까 마음이 쓰여서다. 애틋한 사랑도 거룩한 사랑도 근원을 따라가면 이 같은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세상살이가 힘들어질수록 놓치지 말아야 할 것들. 관심, 사랑, 위로, 도움, 배려…. 듣기만 해도 훈훈해지는 단어들이다. 주위에 누군가 목말라 한다면, 이런 마음으로 빚어진 큰 물덩이를 기꺼이 건네볼 일이다. 그가 다시 일어나 찬란한 이 봄을 맞을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