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민주주의는 없다·아녜스 바르다의 말

인간의 글쓰기 혹은 글쓰기 너머의 인간

▲ 민주주의는 없다 = 애스트라 테일러 지음, 이재경 옮김.
고대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민주주의'를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시민(데모스)의 통치(크라토스)'라는 뜻이 되지만, 누구를 국민(시민)으로 간주해야 하고, 그들이 어떻게 통치하고, 어디서 통치하는지는 영원한 논쟁거리다. 저자는 이런 모호함과 변화무쌍함이야말로 민주주의 개념이 지닌 힘의 원천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다큐멘터리를 주로 만드는 독립영화 감독이자 작가이며 월가 점령 운동에 열정적으로 참여한 활동가이기도 하다.

2019년 개봉한 저자의 다큐멘터리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를 바탕으로 한 이 책은 민주주의가 상충하는 가치들을 함께 끌어안고 가는 역설의 시스템이라고 전제하면서 긴장 속에 조화를 이뤄야 하는 민주주의적 가치들의 쟁점을 8가지로 정리한다. 자유와 평등, 갈등과 합의, 포함과 배제, 강제와 선택, 즉흥과 체계, 전문지식과 여론, 지역과 세계, 현재와 미래다.

저자는 부탄의 민주주의 현장부터 난민 캠프, 미국의 대선투표 현장을 누비며 우리가 추상적으로만 여긴 민주주의의 사각지대를 고발한다.

부의 불평등, 무한 성장의 굴레, 인종주의와 난민, 환경문제 등을 들여다보면 지금 세계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역행하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 저자는 이 같은 현상들은 민주주의를 이루는 가치의 균형이 깨졌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그러면서 아무도 본 적 없는 민주주의의 윤곽을 그리는 것, 그것은 우리가 오로지 집단으로만, 집단지성으로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 군중은 생각하고 사유해야만 하며, 거기에는 민주주의에 내재하는 역설들을 숙고하는 것까지 포함된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반니. 472쪽. 2만2천원.
▲ 아녜스 바르다의 말 = 제퍼슨 클라인 엮음, 오세인 옮김.
'누벨바그의 대모'로 불린 프랑스 영화감독 아녜스 바르다(1928~2019)의 생애와 작품 세계, 예술 철학을 엿보게 하는 인터뷰 20편을 미국 보스턴대 프랑스어 교수이자 영화평론가인 제퍼슨 클라인이 정리했다.

바르다는 기성 상업영화 관습을 거부하고 저예산, 즉흥성, 자유로운 촬영 기법을 중시한 누벨바그 선구자다.

첫 작품 '라 푸앵트 쿠르트로의 여행'을 만들 때까지 영화를 거의 보지 않았다는 고백처럼 영화를 잘 몰랐기에 오히려 기존 영화 어법을 답습하지 않을 수 있었다.

책은 각본가, 영화평론가, 배우 등 각기 다른 20명과 한 인터뷰를 시대순으로 수록했다.

유년 시절 여러 지역을 옮겨 다니며 자란 덕에 자유의 감각을 얻게 됐다는 회고부터 영화감독이자 창작자로서 느끼는 고충과 희열, 외부 반응에 휘둘리지 않으며 예술적 자아를 유지하는 힘, 삶과 사람을 향한 애정, 여성운동의 흐름에 대한 견해까지 다양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영화는 물론 사진에서부터 설치 미술에 이르기까지 한계 없는 예술 활동을 한 그이지만 업적과 명성 측면에서는 언제나 장 뤽 고다르, 프랑수아 트뤼포, 에리크 로메르 등 동시대 남성 감독 뒤에 설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영화를 만드는 매 순간 "호랑이처럼 싸워야만" 했으나 한편으로는 자신이 "철학적이지도 형이상학적이지도 않다"면서 겸손해할 줄 알았다.

마음산책. 440쪽. 2만2천원.
▲ 인간의 글쓰기 혹은 글쓰기 너머의 인간 = 김영민 지음.
긴 세월 글을 통해서, 글쓰기로써, 그리고 글과 함께 공부길을 걸은 저자가 글쓰기 철학을 논한다.

인문학은 읽고 쓰는 것이되, 쓰기가 없다면 그 앎은 한 번도 수면 위에 떠오르지 못한 채 물속으로 가라앉아 버릴 것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그러므로 그가 보기에 책 읽고 공부하는 이들은 쓰기를 지속하면서 하나의 색깔로 수렴되지 않는 복잡한 삶을 어떻게 담아낼까를 고심해야 하며 이는 학술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특히 근대 서구의 이성 중심주의의 글쓰기를 절대무기처럼 여겨온 논문 작성을 한국 사회는 아무런 비판 없이 지난 수십년간 답습해 오고 있다고 문제를 제기한다.

원전만을 깍듯이 모시는 문화에 대해서도 '자기 집을 제대로 못 짓고 있는 형국'에 빗대며 비판한다.

그러면서 "구걸만 하는 학문을 학문이라 할 수 없으며 원전 바깥의 세상도 믿을 만하고 살 만하다는 것을 학자들은 용기와 성숙으로 보여줘야 한다"고 주장한다. 글항아리. 688쪽. 3만2천원.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