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제금융 조건 놓고 유럽서 불거진 '그린딜 논쟁'

EU "탄소배출량 감소, 구제금융 전제조건 아냐"
각국 정부에 사실상 책임 떠넘긴 EU
코로나19로 타격받은 유럽 그린딜
코로나19 사태 끝나면 그린딜 본격화 전망
유럽연합(EU)이 기후변화 대응을 위해 역점 추진하는 녹색정책(그린딜)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혼선을 빚고 있다. 코로나19로 타격을 받은 기업들에게 각국 정부가 구제금융을 지원하는 과정에서 탄소배출량 감소 등 이른바 ‘녹색조건’을 의무화할지 여부를 놓고 의견이 엇갈리고 있어서다.

12일(현지시간) EU 관련 전문매체인 유랙티브닷컴에 따르면 EU 행정부인 집행위원회는 지난 11일 회원국 정부의 구제금융 지원 관련 임시 규정을 공개했다. 집행위는 구제금융을 받는 기업들은 배당금과 자사주 매입(바이백), 임원 보너스 지급 등이 금지된다고 밝혔다. 다만 집행위는 논란이 됐던 녹색조건은 규정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녹색조건은 정부 구제금융을 받는 기업들이 그 대가로 탄소배출량을 얼마나 줄이고, 재생에너지 사용을 얼마나 늘릴지를 명시한 조건이다. 집행위는 녹색조건을 구제금융의 전제조건으로 삼을지에 대해선 각국 정부가 자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고 밝혔다. 사실상 각국 정부에 책임을 떠넘긴 것이다.

EU는 지난해 말부터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녹색정책을 최우선 과제로 추진하고 있다.. 목표는 오는 2050년까지 실질적인 탄소 순배출 총량을 ‘0’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해 태양광 등 재생에너지 분야 기업에겐 대출규제를 완화해주고, 화석연료 사업에 대한 투자는 대폭 줄이는 등 녹색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코로나19의 급격한 확산으로 유럽 경제가 막대한 타격을 받으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유럽 경제의 핵심인 항공과 자동차산업 등이 코로나19로 막대한 타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항공과 자동차산업은 유럽에서 탄소배출량이 많은 분야로 꼽힌다. 위원회는 “구제금융의 목표는 코로나19로 타격받은 기업들의 유동성과 지급능력에 대처하도록 돕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EU의 이번 결정에 대해 유럽의회와 환경단체들은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EU의 핵심 과제인 그린딜이 시작부터 차질을 빚을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구제금융 대가로 녹색조건을 의무화하지 않는 국가가 상당수일 것이라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프랑스 정부는 국적항공사인 에어프랑스에 70억유로의 자금을 지원하면서 탄소배출량 감소를 전제조건으로 제시했다. 반면 독일 정부는 루프트한자에 100억유로를 지원하는 과정에서 탄소배출량 감소를 구체적인 전제조건으로 제시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도 “탄소배출량을 낮추기 위해 유럽이 추진하는 그린딜이 코로나19로 인해 몇 주만에 타격을 받고 있다”고 전했다. EU의 그린딜에 부정적인 입장을 고수해 왔던 체코와 폴란드 등 일부 동유럽 국가들은 그린딜을 전면 폐지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다만 EU가 역점 추진하는 그린딜은 코로나19 사태가 끝나면 본격적으로 탄력을 받을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덴마크, 핀란드, 이탈리아, 라트비아,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포르투갈, 스페인, 스웨덴, 그리스 등 EU 회원국 13개국은 지난달 중순 재생에너지를 중심으로 하는 그린딜을 코로나19 사태에 따른 경기부양의 핵심수단으로 사용하겠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유럽 현지 매체는 코로나19로 국제유가가 바닥을 찍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유럽이 재생에너지 산업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는 계기라고 전했다. 통상 저유가 현상이 계속되면 기존 석탄·석유에너지에서 재생에너지 산업으로의 전환이 지연될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기존의 주력 에너지원 가격이 싼 값에 형성돼 있는 상황에서 굳이 비싼 돈을 줘가며 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을 서두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유럽 국가에선 풍력과 태양광 등 재생에너지 발전단가가 기존 에너지원을 밑돌고 있다. 각국 정부가 2000년대 초반부터 재생에너지 분야 투자에 주력했기 때문이다. 2018년 기준 EU 회원국의 전력 생산 중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한 에너지원은 석탄·석유·가스로 45.9%였다. 이어 △원자력(25.5%) △풍력(12.2%) △수력(11.8%) △태양광(4.0%) △지열(0.2%) 등의 순이었다. 풍력과 수력, 태양광 등 통상 재생에너지로 분류되는 에너지원은 28.0% 수준이다.
하지만 이는 석탄발전 비중이 높은 동유럽 회원국까지 포함한 수치다. 서유럽 국가로 한정하면 재생에너지 비율은 40%까지 육박한다. 영국의 재생에너지 비중도 2018년 말 기준 전체 에너지원의 37.1%에 달한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2040년 전 세계 전력발전에서 재생에너지 발전이 차지하는 비중은 2018년 기준 25%에서 40%까지 늘어날 전망이다. 반면 40%를 차지하는 석탄발전 비중은 25%로 축소될 것으로 분석했다.

런던=강경민 특파원 kkm1026@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