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책이라는 벗

최현숙 < IBK캐피탈 대표이사 jaynne@ibkc.co.kr >
정조의 홍재(弘齋), 이덕무의 팔분당(八分堂), 박지원의 연암산방(燕岩山房)…. 조선 시대 지식인들의 서재다. 그들의 서재는 학문과 사상, 탐독과 사유의 장소였다. 창작의 공간이자, 시대를 고민하고, 미래를 탐구하는 연구소이기도 했다.

그래서 서재 이름에는 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담겨 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서재를 뜻하는 정조의 홍재, 10분의 완성을 위한 7분과 9분 사이 이덕무의 팔분당, 웃음과 해학의 대화방인 박지원의 연암산방. 그들은 서재에서 자신만의 세상을 만들고 또 다른 세상과 접속하며 활발히 소통했을 것이다. 마치 지금의 소셜 네트워크처럼.“요즘 무슨 책 읽으세요?”라고 물으면 대부분 말끝을 흐린다. 바쁘다는 것이 이유다. 나 또한 이런저런 일정을 핑계로 책을 자주 읽지 않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평소에 책 읽는 습관을 들이지 않으면 시간을 내서 책 읽기는 더욱 어렵다. 시력(視力)과 지력(知力)과 인내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책을 읽다 보면 사고의 깊이와 넓이가 변한다. 가와기타 요시노리는 책을 통해 우리는 “아인슈타인의 실험실에도 초대받을 수 있고 빌 게이츠와 점심을 함께할 수도 있다. 독서가 아니면 이처럼 호사로운 경험을 또 어디에서 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인터넷 서점에서 책값은 어림잡아 1만원 안팎이다. 이 정도 비용으로 세상의 지혜를 살 수 있다니 이런 횡재가 또 있을까?

살다 보니, 우리 인생은 셀 수 없이 많은 오리무중(五里霧中)과 진퇴유곡(進退維谷)으로 이어진 고개임을 알겠다. 지나온 길들을 거쳤다고 해서 앞에 놓인 길을 예측할 수는 없다. 설사 안다고 해도 그 길은 전혀 새로운 길일 것이다. 우리의 삶 자체가 미지(未知)인 까닭이다. 실패와 불안은 도처에 숨어있고, 위기는 늘 우리를 따라다닌다. “책 읽는 습관을 기르는 것은 인생에서 모든 불행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피난처를 만드는 것”이라고 서머싯 몸은 말했다. 움베르토 에코는 “책은 생명보험이며, 불사(不死)를 위한 약간의 선금”이라고 했다. 책은 예기치 않은 고난의 순간에 용기와 지혜를 준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보장성 보험에 드는 일과 같다.책 읽을 시간이 없는데…. 이 말은 그만큼 남의 기준과 목표에 맞춰 살고 있다는 방증일 것이다. 내가 삶의 기준이 아니다 보니, 나의 시간을 고스란히 남에게 넘겨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책이 지식 자본이다. 아는 게 정말 힘이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삶에 나의 후원자가 돼 줄 친절한 벗이다. 그 벗들이 많을수록, 그들과 친할수록 나의 힘은 강해진다.

재택근무가 늘어나면서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박지원의 연암산방만큼은 아니더라도 집 안에 자그마한 독서 공간을 만들면 어떨까. 그곳에서 책이라는 벗들과 지력(知力)을 키운다면? 세상은 강한 자가 아니라, 아는 자가 이기게 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