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코로나 승자' 베트남…올 2.7% 성장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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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경제 길라잡이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 4월 베트남의 올해 경제성장률을 2.7%로 본다는 경제 전망치를 발표했다. 올해 세계 경제 성장률은 -3%, 선진국 평균은 -6.1%, 대부분 국가의 경제 전망치가 마이너스로 예상되는 상황에서 베트남이 거의 유일하게 높은 ‘점수’를 받았다. 개인적으로는 상당한 의문이 있지만, 최근 베트남 정부는 공식적으로 더 이상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환자가 없다며 코로나 종식 선언을 했고, 한국 언론에서는 포스트 코로나의 승자가 베트남이 될 것이라는 기사가 등장하기도 했다.
오철 교수의 신흥국이 궁금해 (6) 베트남
(1) 글로벌 공급망 대체지로 떠오른 베트남그러지 않아도 최근 몇 년간 벌어진 미·중 무역전쟁에서 베트남이 중국 공급망의 대체지로 부상했는데, 그 입지를 굳히는 느낌이다.
베트남은 인구가 약 9600만 명에 달하고, 면적은 대한민국의 3.3배인 역동적인 신흥국이다. 베트남전쟁을 끝내고 높은 경제성장을 이뤄 주목받는 국가이고, 대한민국과는 최근 활발히 교류하고 있다. 2019년 약 400만 명의 한국인이 베트남을 방문했고, 특히 중부에 자리 잡은 다낭이라는 휴양도시에는 한국인이 너무 많아서 ‘경기도 다낭시’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한국에 입국하는 베트남인도 크게 늘어나 2019년 50만 명 이상의 베트남인이 한국을 방문했고, 한국에서 공부하는 유학생은 16만 명에 이르러 중국 유학생에 이어 2위를 차지하고 있다.
급격한 체제 변경으로 보트 난민 발생…현대사의 비극베트남은 전쟁 이후 어떤 과정을 거쳐 아세안(ASEAN)의 잘나가는 신흥국이 되었을까? 베트남전쟁은 공식적으로 1975년 4월 베트남의 남부도시 사이공(현재 호찌민) 함락으로 종식된다. 하지만 통일 이후에도 베트남의 역사는 그리 순탄치 않았다. 바로 이어서 킬링필드를 일으킨 이웃 나라 캄보디아의 크메르루주 정권과 여러 차례 전쟁을 치러야만 했고, 뒤이어 1979년에는 중국과 상당한 규모의 전쟁을 했다.
베트남은 이처럼 통일 이후 또다시 캄보디아 및 중국과 전쟁을 치렀고, 일련의 사회주의 정책과 국유화를 급속하게 추진하는 과정에서 생산성이 급격하게 하락해 경제적으로도 큰 어려움을 겪었다. 경제성장률 목표는 16~18%로 잡았지만 실제는 거의 0%에 가까운 결과를 냈고, 광대하고 비옥한 토지를 가지고도 오히려 쌀을 수입할 정도로 베트남의 생산성은 악화됐다. 사회주의 경제정책의 결정적인 실패 원인은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주민들의 강제이주 정책과 화폐개혁이다. 베트남은 이 두 정책의 실패로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된다. 종전 이후 약 10년 동안 경제적으로는 피폐한 상태를 경험하게 되고 세계의 최빈국으로 전락한다. 이 과정에서 대규모 ‘보트 피플’이 발생한다. 보트 피플은 배를 타고 국외로 탈출하는 난민을 말한다. 초기의 보트 피플은 남베트남의 관료, 부유층, 종교인이 많았지만, 1980년을 전후해서는 베트남 화교들이 대거 보트 피플 대열에 합류하게 된다. 중국과는 1979년 전쟁 이후에도 1980년대 내내 산발적인 전투와 대규모 폭격 등 치열한 국경분쟁이 있었다. 중국과의 전쟁에서 오는 인종적 긴장감과 베트남에서 자산 계급의 자산 제한 등 사회주의 정책 진행으로 당시 110만 명 정도의 베트남 화교 대부분이 정부에 토지와 재산을 압류당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베트남 탈출을 시도했는데, 이는 1980년대 중반까지 계속됐다. 보트 피플의 최대 발생 지역은 현재 한국인이 가장 많이 방문해 ‘경기도 다낭시’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관광지 다낭이다. 해상으로 탈출한 보트 피플은 동남아를 떠돌게 된다. 보트 피플은 약 100만 명으로 추산되는데, 그중 50만 명은 해상에서 죽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현대사의 비극 중 하나다.
도이머이 정책으로 시장경제로 대전환이런 11년간의 비극적 세월을 경험한 베트남은 1986년 도이머이(Doi Moi: 쇄신, 혁신)라는 정책 입안을 통해 추격의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다. 과거 사회주의 전략 실패를 인정한 공산당 서기장 응우옌반린의 과감한 결단의 산물이었다. 도이머이는 사회주의에서 시장경제 체제로의 대전환이며, 핵심적 내용은 세 가지 정도로 요약된다. 첫째는 농업협동조합 소유의 토지를 개인에게 할당하는 토지개혁이다. 이 조치를 통해 농업생산성이 급격히 향상됐고, 베트남은 3년 만에 쌀 수출국이 된다. 두 번째로는 외국인 투자법 공포다. 이 법의 공포는 경제를 개방정책으로 전환한다는 대내외적인 신호(signal)를 여러 다국적 기업에 주었다. 이는 투자로 이어졌고, 투자는 많은 고용을 창출했다. 세 번째는 사적 기업 설립권을 인정하는 정책인데, 이 정책을 기초로 1990년 베트남의 회사법이 제정됨으로써 민간기업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된다.
1986년 이후에도 베트남은 정치적 수사로 “사회주의 지향의 시장경제 체제”라는 표현을 썼지만, 도이머이 정책 발표 이후 베트남은 경제적으로 대대적인 시장경제 체제로의 전환과 대외개방 정책을 공식화하게 된다. 이후 베트남은 1992년 대한민국과 수교, 1995년에 미국과 역사적인 수교와 아세안 가입, 1996년 유럽연합(EU)과 무역협정 체결, 2000년 호찌민증권거래소 설립, 2007년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으로 이어지면서 도이머이 34년 만에 경제 규모가 14배로 성장하는 등 경제적으로 베트남 역사상 전례 없는 발전을 하게 된다.오철 < 상명대 글로벌경영학과 교수 >
NIE 포인트
①베트남이 중국을 대신해 세계 각국 기업의 생산기지 역할을 하는 ‘세계의 공장’이 될 수 있을까.
②베트남에서 1970~1980년대 ‘보트 피플’이 대거 발생한 이유는 무엇일까.
③베트남 고속 경제성장의 시발점이 된 1986년 도이머이 정책의 주요 내용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