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파리 목숨' 국제기구 수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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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5월 ‘일대일로(一帶一路) 정상 포럼’이 베이징에서 성대하게 막을 올렸다. 김용 당시 세계은행(WB) 총재는 “세계은행은 자원을 총동원해 (일대일로) 구상의 위대한 비전이 실현되도록 돕겠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작년 초 돌연 총재직 사퇴를 선언했다. 임기가 3년 반이나 남아 있던 터였다.
이번엔 호베르투 아제베두 세계무역기구(WTO) 사무총장이 오는 8월 말 물러나겠다고 지난 14일 전격 밝혔다. 임기를 1년 앞두고 ‘스스로’ 하차하겠다는 것이다. 이들 모두 ‘개인적 결정’이란 점을 강조했다. 김 전 총재는 “사임 압력은 없었다”, 아제베두는 “어떤 정치적 고려도 없다”고 했다.하지만 그 배경에 미국의 압박이 있었을 것이란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나온다. 김 전 총재 재임 시절, 미국은 세계은행이 중국을 포함한 중진국에 과도한 재정 지원을 하고 있다며 상당한 거부감을 보였다. WTO와 관련해서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중국에 개발도상국 지위를 부여해 이익을 줬다”고 비난했다. 트럼프는 또 세계보건기구(WHO)의 친중 행보에 불만을 터뜨리며 WHO에 대한 미국 분담금의 지급 중단을 선언해 거브러여수스 사무총장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국제기구 수장들이 ‘파리 목숨’이나 다름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국제사회만큼 ‘힘’이 지배하는 곳도 드물다. 국제기구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강대국들이 좌지우지해왔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보통 그런 ‘힘’은 물밑에서 주로 작동하고 표면화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최근 국제기구 장(長)들의 수난은 격화된 미·중 패권 경쟁의 결과라는 평가가 많다. 중국의 국제사회 영향력 증대를 막으려는 미국의 견제가 수장들을 희생양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유엔 산하 15개 국제기구 가운데 중국인이 수장인 곳은 유엔식량농업기구(FAO), 유엔산업개발기구(UNIDO) 등 네 곳이다. 작년 초 FAO 사무총장 선거에선 중국이 미는 인사가, 지난 3월 세계지식재산권기구(WIPO) 사무총장 선거는 미국이 추천한 인사가 당선되는 등 기싸움이 대단하다.이런 현상은 ‘자국 우선주의 대두, 세계화 퇴조’와도 맞물려 있다. 자유무역의 보루인 WTO 수장조차 수모를 겪는 시대가 됐다. 마치 오너 마음에 안 들면 언제든 손 털고 나와야 하는 월급쟁이 사장처럼 비춰져 씁쓸하다.
장규호 논설위원 danielc@hankyung.com
이번엔 호베르투 아제베두 세계무역기구(WTO) 사무총장이 오는 8월 말 물러나겠다고 지난 14일 전격 밝혔다. 임기를 1년 앞두고 ‘스스로’ 하차하겠다는 것이다. 이들 모두 ‘개인적 결정’이란 점을 강조했다. 김 전 총재는 “사임 압력은 없었다”, 아제베두는 “어떤 정치적 고려도 없다”고 했다.하지만 그 배경에 미국의 압박이 있었을 것이란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나온다. 김 전 총재 재임 시절, 미국은 세계은행이 중국을 포함한 중진국에 과도한 재정 지원을 하고 있다며 상당한 거부감을 보였다. WTO와 관련해서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중국에 개발도상국 지위를 부여해 이익을 줬다”고 비난했다. 트럼프는 또 세계보건기구(WHO)의 친중 행보에 불만을 터뜨리며 WHO에 대한 미국 분담금의 지급 중단을 선언해 거브러여수스 사무총장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국제기구 수장들이 ‘파리 목숨’이나 다름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국제사회만큼 ‘힘’이 지배하는 곳도 드물다. 국제기구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강대국들이 좌지우지해왔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보통 그런 ‘힘’은 물밑에서 주로 작동하고 표면화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최근 국제기구 장(長)들의 수난은 격화된 미·중 패권 경쟁의 결과라는 평가가 많다. 중국의 국제사회 영향력 증대를 막으려는 미국의 견제가 수장들을 희생양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유엔 산하 15개 국제기구 가운데 중국인이 수장인 곳은 유엔식량농업기구(FAO), 유엔산업개발기구(UNIDO) 등 네 곳이다. 작년 초 FAO 사무총장 선거에선 중국이 미는 인사가, 지난 3월 세계지식재산권기구(WIPO) 사무총장 선거는 미국이 추천한 인사가 당선되는 등 기싸움이 대단하다.이런 현상은 ‘자국 우선주의 대두, 세계화 퇴조’와도 맞물려 있다. 자유무역의 보루인 WTO 수장조차 수모를 겪는 시대가 됐다. 마치 오너 마음에 안 들면 언제든 손 털고 나와야 하는 월급쟁이 사장처럼 비춰져 씁쓸하다.
장규호 논설위원 daniel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