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곡진 5·18역사 고스란히 보여준 故 임은택씨의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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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기념식서 부인 최정희씨의 절절한 편지 소개 18일 5·18민주화운동 40주년 기념식에선 허망하게 남편을 잃은 최정희(73) 씨가 억울하게 희생된 남편 고(故) 임은택씨의 이야기를 전한다. 임씨의 이야기는 계엄군의 민간인 학살과 시신 암매장, 왜곡된 기록까지 5·18의 아픔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부산 국제시장에서 만난 임씨 부부는 1978년 담양으로 이주해 소를 파는 자영업을 하던 중 5·18을 맞았다.
계엄군이 광주를 봉쇄하기 위해 외곽지역으로 물러난 1980년 5월 21일 임씨는 주변 사람들에게 "광주에서 군인들이 빠져나가 안전하다"는 말을 들었다. 마침 광주에서 받아야 할 돈도 있고, 상황도 궁금했던 임씨는 일행 3명과 함께 픽업트럭을 타고 광주로 향했다.
광주로 들어가는 길목인 광주교도소 인근을 지나던 임씨 일행은 어디선가 들려온 총소리에 겁을 먹고 차를 되돌렸지만 광주교도소에 주둔하던 3공수여단은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당시 계엄군은 이곳 이외에도 화순, 장성 등으로 통하는 다른 광주 외곽지역에서도 민간인이 타고 있는 미니버스에 집단 발포하거나 저수지에서 놀고 있던 어린아이를 사살하는 등 민간인 학살을 저질렀다. 임씨와 고귀석씨는 총에 맞아 움직이지 못하고, 몸을 가눌 수 있는 일행 2명만 차를 버리고 도망쳤다.
밤이 깊을 때까지 돌아오지 않은 남편을 기다리던 아내 최씨는 뜬눈으로 밤을 지샜다.
다음날 일찍 마을 어귀에 나간 최씨는 남편과 함께 차를 타고 나간 두 사람에게서 청천벽력같은 소리를 들었다. 임씨와 고씨가 총에 맞았다는 얘기였다.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로 마을 사람들과 함께 남편을 찾아 나섰다.
임씨는 교도소 인근 도로에서 처참한 형태로 남겨진 픽업 차량을 발견했다.
차량엔 핏자국이 선명했고, 인근 도랑에서 총구멍이 난 남편의 옷과 신발을 찾아냈다.
시신은 찾을 수 없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분명 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 임씨는 그때부터 병원이라는 병원은 다 찾아다녔다.
하지만 5월 항쟁이 끝날 때까지 남편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남편의 생사를 걱정하며 마음 졸이던 최씨는 5월 31일 광주시가 교도소 부근에 암매장된 시신을 발굴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다.
그 자리에서 구두 한짝과 팬티만 입은 임씨의 시신이 발견됐다.
계엄군이 총에 맞은 임씨를 치료하지 않거나 수습하지 않고, 시신을 암매장한 셈이었다.
4발의 총상을 맞은 임씨의 시신은 부검을 위해 조선대병원으로 옮겨졌다.
그의 검시 기록에는 시민군이 지니고 있던 '카빈 소총'에 의한 총상으로 기록됐다.
3공수여단 작전 지도에 임씨가 피격됐다는 기록과 달리 시민군에게 총을 맞은 것처럼 검시 기록을 조작한 것이었다.
검시가 끝난 임씨의 시신을 수습한 아내 최씨는 홀몸으로 아이들을 키워내야 했다.
남편이 장사하느라 여기저기 끌어온 돈을 갚으라는 독촉이 이어졌지만, 받아야 할 돈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나중에 유공자로 인정돼 나온 얼마 되지 않은 보상금도 빚을 갚고 나니 한 푼도 남아있지 않았다.
형사들의 감시를 피해 친정이 있는 부산으로 이사를 하였지만, 그곳에서도 감시가 이어져 친정 식구들까지 고통을 받게 되자 임씨는 다시 담양으로 이사를 왔다.
그리고 홀로 국밥집을 시작해 14년을 운영하며 자식들을 키워냈다.
아버지 없이 잘 커 준 아이들에게 고마울 따름이었다.
최씨는 "당신이 떠난지 40년이 지났지만 난 아직도 그날 일이 생생하다"며 "젊은 나이에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당신이 너무 불쌍하기만 하다"고 마음을 담은 편지를 전했다. 이어 "다시 만나는 날 삼남매 번듯하게 키웠다고 칭찬해달라"며 "우리 만나는 날까지 부디 편히 쉬시라"고 말했다.
/연합뉴스
부산 국제시장에서 만난 임씨 부부는 1978년 담양으로 이주해 소를 파는 자영업을 하던 중 5·18을 맞았다.
계엄군이 광주를 봉쇄하기 위해 외곽지역으로 물러난 1980년 5월 21일 임씨는 주변 사람들에게 "광주에서 군인들이 빠져나가 안전하다"는 말을 들었다. 마침 광주에서 받아야 할 돈도 있고, 상황도 궁금했던 임씨는 일행 3명과 함께 픽업트럭을 타고 광주로 향했다.
광주로 들어가는 길목인 광주교도소 인근을 지나던 임씨 일행은 어디선가 들려온 총소리에 겁을 먹고 차를 되돌렸지만 광주교도소에 주둔하던 3공수여단은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당시 계엄군은 이곳 이외에도 화순, 장성 등으로 통하는 다른 광주 외곽지역에서도 민간인이 타고 있는 미니버스에 집단 발포하거나 저수지에서 놀고 있던 어린아이를 사살하는 등 민간인 학살을 저질렀다. 임씨와 고귀석씨는 총에 맞아 움직이지 못하고, 몸을 가눌 수 있는 일행 2명만 차를 버리고 도망쳤다.
밤이 깊을 때까지 돌아오지 않은 남편을 기다리던 아내 최씨는 뜬눈으로 밤을 지샜다.
다음날 일찍 마을 어귀에 나간 최씨는 남편과 함께 차를 타고 나간 두 사람에게서 청천벽력같은 소리를 들었다. 임씨와 고씨가 총에 맞았다는 얘기였다.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로 마을 사람들과 함께 남편을 찾아 나섰다.
임씨는 교도소 인근 도로에서 처참한 형태로 남겨진 픽업 차량을 발견했다.
차량엔 핏자국이 선명했고, 인근 도랑에서 총구멍이 난 남편의 옷과 신발을 찾아냈다.
시신은 찾을 수 없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분명 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 임씨는 그때부터 병원이라는 병원은 다 찾아다녔다.
하지만 5월 항쟁이 끝날 때까지 남편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남편의 생사를 걱정하며 마음 졸이던 최씨는 5월 31일 광주시가 교도소 부근에 암매장된 시신을 발굴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다.
그 자리에서 구두 한짝과 팬티만 입은 임씨의 시신이 발견됐다.
계엄군이 총에 맞은 임씨를 치료하지 않거나 수습하지 않고, 시신을 암매장한 셈이었다.
4발의 총상을 맞은 임씨의 시신은 부검을 위해 조선대병원으로 옮겨졌다.
그의 검시 기록에는 시민군이 지니고 있던 '카빈 소총'에 의한 총상으로 기록됐다.
3공수여단 작전 지도에 임씨가 피격됐다는 기록과 달리 시민군에게 총을 맞은 것처럼 검시 기록을 조작한 것이었다.
검시가 끝난 임씨의 시신을 수습한 아내 최씨는 홀몸으로 아이들을 키워내야 했다.
남편이 장사하느라 여기저기 끌어온 돈을 갚으라는 독촉이 이어졌지만, 받아야 할 돈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나중에 유공자로 인정돼 나온 얼마 되지 않은 보상금도 빚을 갚고 나니 한 푼도 남아있지 않았다.
형사들의 감시를 피해 친정이 있는 부산으로 이사를 하였지만, 그곳에서도 감시가 이어져 친정 식구들까지 고통을 받게 되자 임씨는 다시 담양으로 이사를 왔다.
그리고 홀로 국밥집을 시작해 14년을 운영하며 자식들을 키워냈다.
아버지 없이 잘 커 준 아이들에게 고마울 따름이었다.
최씨는 "당신이 떠난지 40년이 지났지만 난 아직도 그날 일이 생생하다"며 "젊은 나이에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당신이 너무 불쌍하기만 하다"고 마음을 담은 편지를 전했다. 이어 "다시 만나는 날 삼남매 번듯하게 키웠다고 칭찬해달라"며 "우리 만나는 날까지 부디 편히 쉬시라"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