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기업을 꺾고 싶어? 그럼 그 회사를 사버려…M&A는 '지옥의 레이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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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노믹스 - '포드 V 페라리'로 본 경쟁시장
페라리는 지고도 이겼다

1960년대 미국 포드 본사, 마케팅 임원인 리 아이아코카(존 번탈 분)는 회장 헨리 포드 2세(트레이시 레츠 분) 앞에서 이렇게 프레젠테이션(PT)한다. 그는 “젊은 세대는 부모님이 운전하던 포드가 아닌, 빠르고 섹시한 페라리를 원한다”며 “카 레이싱(경주)을 시작해야 하는 이유”라고 선언한다. 헨리 포드 2세는 “한 달에 우리의 하루 생산량도 못 만드는 회사를 따라가야 하는 이유가 뭐냐”고 묻는다. 아이아코카가 답한다. “‘차의 의미’ 때문이죠. 포드 배지가 승리를 의미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헨리 포드 2세의 눈이 번뜩인다.포드는 왜 페라리 인수에 나섰나

포드는 왜 굴욕을 감수하고 인수를 먼저 제안했을까. 페라리 같은 수준의 차를 직접 개발하기 위해 들여야 하는 시간과 비용을 아낄 수 있어서다. 기업은 M&A를 통해 자사에 없는 생산 시설, 판로, 인력, 브랜드 등 경영 자원을 한번에 얻을 수 있다. 높은 진입 장벽을 곧바로 넘을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유행이 빠르게 변하는 산업에서 기업에 시간은 ‘금’이다. 페이스북이 2012년 10억달러를 들여 인스타그램을 인수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트렌드로 뜨고 있는 사진·해시태그 중심 서비스를 개발해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보다 이미 성공 단계에 진입한 회사를 사들이는 게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차별화해야 사는 독점적 경쟁 시장
셸비와 마일스는 ‘페라리보다 뛰어난 차’를 만들어야 했다. 더 가벼운 차체와 성능 좋은 엔진이 필요했다. 마일스는 차체 전체에 깃털을 붙여 달려보기도 하고, 자동차에 불이 붙는 사고를 당하면서도 의지를 꺾지 않았다. 밤낮없는 노력은 ‘GT40’라는 결과물을 내놨다. 포드의 첫 레이싱카이자 경쟁의 산물이었다. 두 기업은 왜 그렇게 치열한 대결을 벌였을까. 글로벌 자동차시장이 ‘차별화’하지 않으면 생존하기 어려운 시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림 2>의 왼쪽 그래프는 ‘완전 경쟁 시장’의 수요-가격 곡선이다. 이 시장은 판매·구매자의 수가 무한하고 제품이 표준화됐다. 기업 진입과 퇴출이 완전히 자유롭다. 공급이 무한한 까닭에 특정 회사가 공급을 늘린다고 해도 가격에 변동을 주지 못한다. 그러니 제품 광고를 할 필요도 없다.
경쟁은 내부에도 있었다. 포드의 또 다른 임원인 레오 비브(조시 루카스 분)는 마일스를 탐탁지 않아 한다. 그는 “포드는 ‘신뢰’를 의미하는데, 마일스는 그런 이미지가 아니다”며 “‘포드스러운’ 드라이버가 필요하다”고 일침을 놓는다. 결국 포드는 다른 선수들로 팀을 꾸려 첫 레이스에 나선다. 그러나 이변 없이 페라리에 패한다. 마일스만큼 차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헨리 포드 2세는 다시 셸비와 마일스에게 기회를 준다. 르망24 전에 열리는 ‘데이토나 레이스’에서 1등을 하는 것이 조건이었다. 마일스는 보란 듯이 기회를 잡아낸다. 비브가 꾸린 팀을 제치고 선두를 따낸다. 셸비-마일스를 포함해 포드 내 총 세 팀이 르망24에 공동 출전한다.
브레이크를 밟게 한 ‘후광 효과’
르망24에서 포드는 이변을 일으킨다. 마일스는 밤낮없이 달렸고 경쟁자인 페라리의 선수는 빗길에 미끄러져 탈락하고 만다. 1~3위는 모두 포드 팀, 그중 선두는 마일스였다. 우승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 비브가 또다시 훼방을 놓는다. “1~3위를 함께 결승선에 들어오게 하자”고 헨리 포드 2세를 설득한다. ‘그림이 되게 만들자’는 것이었다. 헨리 포드 2세는 이를 받아들였고 셸비는 마일스에게 “원하는 선택을 하라”고 한다. 늘 그랬듯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기를 바라면서.
헨리 포드 2세는 왜 비브의 ‘밉상 제안’을 받아들였을까. 행동경제학에서는 ‘후광 효과(Halo Effect)’를 기업 마케팅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설명한다. 브랜드의 이미지가 머리에 강하게 박히면 브랜드 충성도가 높아지는 현상이다. 브랜드 이미지가 제품의 ‘후광’이 되는 것이다. 제품과 서비스의 본래 가치를 뛰어넘는 이미지를 전달해 소비자 구입을 유도하는 것이다. 판매량 급락이 고민이었던 헨리 포드 2세에게 포드의 ‘후광 효과’를 극대화하자는 제안은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 마일스는 울분을 토하듯 도로를 질주한다. 자신의 기록도 갈아치웠다. 그러나 우승을 코앞에 둔 그는 무언가 결심한 듯 브레이크를 밟기 시작한다. 뒤처져 있던 두 차가 그를 향해 다가오고, 비브의 계획대로 세 팀은 결승선을 함께 끊는다. 그러나 우승자는 마일스가 아니었다. 마일스의 출발선이 더 앞에 있었기 때문이다.포드는 영화에서처럼 1966년 실제 페라리를 제치고 르망24에서 1~3위를 차지한다.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포드’가 적힌 레이싱카 세 대가 결승선을 끊는 모습은 전 세계 신문 1면을 장식했다. 마일스는 그 뒤에도 셸비와 함께 자동차 개발 테스트를 하다가 불의의 사고로 도로 위에서 세상을 떠났다. 역사적인 기업의 승리 뒤에 역설적으로 경쟁을 포기한 개인이 있었다는 사실은 이 영화가 아니었다면 잘 알려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정소람 기자 ra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