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 혁파"…대통령 令이 안 선다

꿈쩍도 않는 정부부처

文 국무회의 발언 후 2주
35개 규제 오히려 신설

21대 당선자들 '1호 법안'도
경제 옥죄는 규제투성이
< 오늘부터 21대 국회…협치의 門 열어라 > 21대 국회가 30일 임기를 시작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속에 ‘일하는 국회’로 거듭나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29일 국회 관계자들이 개원 축하 현수막이 걸린 국회 본청 앞을 지나가고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규제 혁파 필요성을 강조했지만 일선 정부 부처는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오히려 심사숙고 없이 규제만 양산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30일 임기를 시작하는 21대 국회에서도 규제를 강화하는 법안이 쏟아질 전망이다.

29일 정부에 따르면 규제개혁위원회는 5월 둘째주(11~15일)와 셋째주(18~22일) 규제 예비심사에 상정된 36개 규제 중 35개를 ‘비중요 규제’로 분류해 통과시켰다. 비중요 규제로 분류되면 규제개혁위 본회의 심사를 거치지 않고 시행되거나 국회로 넘어간다.예를 들어 항공업체들은 새로 생긴 ‘항공안전투자의 공시 기준’에 따라 향후 1년간의 안전투자 계획과 실적을 공시해야 한다.

문 대통령은 지난 10일 취임 3주년 특별연설을 통해 “경제 전시 상황인 만큼 투자 활성화에 적극 나서고 제조업이 활력을 되찾도록 지원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경제계는 이를 규제 완화를 시사한 것으로 받아들여 환영했다. 문 대통령은 또 12일 국무회의에서 “선도형 경제로 가는 데 장애가 되는 요인을 과감히 들어내야 한다”며 규제 완화를 지시했다.

하지만 규제개혁위는 문 대통령 발언이 나온 이후 2주 만에 36개 규제 사항 중 35개를 심도 있는 토론도 없이 시행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과거 정부에선 대통령의 규제 개혁 지시가 나오면 각 부처가 각종 개혁 대상을 선정했으나 이번 정부에선 그런 움직임을 찾아보기 힘들다.21대 국회도 규제법안을 줄줄이 신설할 예정이다. 한국경제신문이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와 언론에 밝힌 당선자들의 1호 법안을 분석한 결과 미정인 41명을 제외한 259명 중 130명이 경제 관련 법안을 준비하고 있다. 이 가운데는 임금 격차 해소를 위한 지원 및 특별법, 공정거래법 개정안 등 규제 강화 법안이 24건으로 가장 많았다. 규제 완화 법안은 18건에 그쳤다.
'규제개혁' 못 따라가는 규제개혁委

문재인 대통령의 ‘규제 개혁’ 의지에도 여전히 규제가 넘쳐나는 원인 중 하나로 규제개혁위원회가 눈치만 보고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꼽힌다. 규개위가 사회적으로 찬반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규제 도입을 번번이 ‘무사 통과’시키고 있어서다.

규개위가 지난 3월 국토교통부의 ‘주택공급에 관한 규칙’ 개정안을 원안대로 통과시킨 게 대표적 사례다. 이 개정안엔 전입 날짜와 상관없이 수도권의 투기과열지구 또는 대규모 택지개발지구에서 주택 청약 1순위를 부여받는 최소 거주 기간을 1년에서 2년으로 늘리는 내용이 담겨 있다. 입법 예고 후 “기존에 전입한 사람에게도 소급 적용하면 선의의 피해자가 생긴다”는 반발이 일었지만, 규개위는 국토부에 ‘원안대로 시행하라’고 주문했다.1월에는 경영계가 강력히 반대하던 ‘5%룰 완화 법안’(자본시장법 시행령 개정안)을 “중요한 규제가 아니다”며 본심사로 넘기지도 않고 통과시켰다. 상장회사의 지분을 5% 이상 보유한 기관투자가 등은 추가로 지분을 늘릴 때 5일 안에 보고·공시해야 한다. 하지만 개정안은 국민연금 등 공적연기금이 상장사들의 지배구조 개선을 요구하는 주주제안을 해 사실상 ‘경영개입’을 하더라도 사전에 공시한 가이드라인에 따른 것이면 보고 의무를 ‘한 달 내 약식보고’로 대폭 완화해줬다.

규개위는 1998년 행정규제기본법이 제정되면서 대통령 직속 자문기구로 출범해 22년이 지난 지금도 같은 위상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조직 위상으로는 쏟아지는 규제를 제대로 심사하는 게 불가능에 가깝다는 평가가 많다. 규개위를 국회로 이관하거나 규제개혁처 등 장관급 기구로 높이는 방안 등이 대안으로 거론된다.

강진규/성상훈/성수영 기자 jose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