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 변신' 전태풍 "한국서 많은 고통받았지만 가장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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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도, 외국인도 아닌 10여년의 삶…그래도 해피엔딩"
"한국에서 10여년은 매순간이 고통이었어요. 이방인으로서 가시밭길을 겪는 설움을 많이 느꼈고, 혼혈이라는 차별과 무시를 많이 받았어요.
즐거웠던 적도 별로 없었어요.
그렇지만 지금 와서 뒤돌아보니까 얻은 것도, 행복한 순간도 많았던 '꽃길'이었더라고요. " 2009년 KBL(한국프로농구연맹) 귀화선수 1세대로 모국을 밟은 뒤 최근 은퇴를 선언한 전태풍(41) 씨는 31일 연합뉴스와 인터뷰를 갖고 "한국에서 배운 것은 농구가 아니라 인생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현역시절 빠른 발놀림과 현란한 드리블로 농구를 잘 모르는 사람도 코트 위의 그를 보면 넋이 나갈 정도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KCC의 2010∼2011 시즌 우승을 이끌기도 했으며, KBL 베스트 5(2010년)와 KBL 어시스트상(2013년) 등을 받기도 했다.
"어머니의 나라는 어떤 곳일까?" 미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전씨는 한번도 가보지 못한 한국이 궁금했다.
미국을 시작으로 프랑스, 터키, 그리스, 불가라아, 크로아티아, 터키, 키프로스 등 10여개 국가의 농구 리그에서 뛰면서 모국 관심은 커져만 갔다. 어느 나라를 가든 그는 '난 한국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크로아티아 리그에서 뛰던 2007년에는 등에 태극기 문신도 새기기도 했다.
그는 "꼭 한번 한국에서 농구하고 싶었다"며 "마침 키프로스 리그에서 뛰던 시절에 KBL에서 귀화 혼혈 선수 드래프트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망설임 없이 도전장을 내밀었다"고 말했다.
미국 국적을 포기해야 했고 연봉도 3분의 1로 줄었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처음 맞닥뜨린 걸림돌은 농구 실력이 아닌 문화 차이였다.
감독과 코치진의 말에 따라야 하는 수직적인 선수단 구조는 해외 리그에서 전혀 겪어보지 못한 분위기였다.
시합이 없던 어느 날, 선수단을 집합 시켜 산을 타고 체력 훈련을 시키던 팀 코치에게 전 씨는 물었다.
"코치님, 마이클 조던이랑 르브론 제임스도 등산해서 농구 잘하는 거예요?"
마이클 조던과 르브론 제임스는 세계 최고의 농구 프로리그인 NBA(미국프로농구)를 대표한 선수들이었다.
그는 "훈련 중 이해가 안 돼서 코치진에게 질문하면 '말대꾸 하지마'라고 했다"며 "나중에는 아무 말도 안했다"고 말했다.
"농구는 창의적으로 해야 해요.
그런데 감독님과 코치님 기분 살피느라 그런 플레이 하기 힘들어요.
한국 선수들 눈치보며 농구해요.
소통 필요해요.
나이 많다고 늙은이의 은어인 '꼰대'가 아니라 젊어도 내 철학만 강요하면 꼰대에요.
나보다 동생이라도 '리스펙트'(respect·존중)하면 꼰대 안 돼요.
" 시간이 흐르면서 조직 분위기에 적응했지만 여전히 낯선 것도 있다.
한국인도, 이방인도 아니라는 귀화선수를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그는 "데뷔했을 때 신인 선수라서 (신인 상한액인) 1억원 이상을 못준다고 하더니, 신인왕 후보를 선정할 때는 '넌 귀화인이니까 자격 없다'고 하더라"며 "난 한국인인가, 외국인인가.
국내선수인가, 외국인선수인가"라고 되물었다.
"차별은 어디에나 있어요.
10곳이 넘는 나라에서 뛰면서 인종 차별을 수도 없이 겪었어요.
그중에 한국이 가장 서운했죠. 모국이고 나도 절반은 한국인이라 애정과 기대치가 커서 더 그랬나 봐요.
"
최근 전씨가 걱정하는 점은 아이들이다.
9살 첫째 아들이 국제학교에 다니는데 곧 국내 일반 초등학교로 전학시킬 예정이다.
행여 놀림이라도 당할까 걱정이 컸지만 아내가 "가족 모두 한국 사람이고, 우리도 여기서 계속 살 건데 다른 친구와 섞여 어울리는 게 맞다"며 그를 설득했다.
그는 "우리 집에서 내가 가장 한국말을 못한다"며 "작년에 태어난 셋째까지 모두 차별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릴 때 받은 상처는 깊게 오래 남으니까…"라고 털어놨다.
"유치원 다닐 때 집에 온 첫째 아들이 '아프리카가 어디야, 난 왜 까만 피부야, 난 왜 곱슬머리야'라고 연달아 물어본 적이 있어요.
어린 친구들은 디스크리미네이션(discrimination·차별) 개념 없어요.
밉지 않아요.
사회 인식이 바뀌면 괜찮아질 거라 믿어요.
"
아픔과 시행착오의 연속이던 한국 생활이지만 2009년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다시 한국행을 택할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처음에는 팬, 감독, 동료, 심지어 농구장 청소하는 아주머니까지 모든 사람이 나를 싫어하는 줄 알았어요.
그래도 여기서 내 인생 가장 큰 선물을 받았잖아요.
가족. 아내와 아이들이요.
응원하는 많은 팬까지요. 이만하면 해피엔딩이죠."
앞으로 방송 활동과 함께 개인 농구 교실을 열고 싶다는 그는 "무슨 일을 하든 솔직하게 얘기하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며 "눈치 보지 않고 이해 안 되는 점은 다 물어볼 것"이라고 환하게 웃었다.
/연합뉴스
"한국에서 10여년은 매순간이 고통이었어요. 이방인으로서 가시밭길을 겪는 설움을 많이 느꼈고, 혼혈이라는 차별과 무시를 많이 받았어요.
즐거웠던 적도 별로 없었어요.
그렇지만 지금 와서 뒤돌아보니까 얻은 것도, 행복한 순간도 많았던 '꽃길'이었더라고요. " 2009년 KBL(한국프로농구연맹) 귀화선수 1세대로 모국을 밟은 뒤 최근 은퇴를 선언한 전태풍(41) 씨는 31일 연합뉴스와 인터뷰를 갖고 "한국에서 배운 것은 농구가 아니라 인생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현역시절 빠른 발놀림과 현란한 드리블로 농구를 잘 모르는 사람도 코트 위의 그를 보면 넋이 나갈 정도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KCC의 2010∼2011 시즌 우승을 이끌기도 했으며, KBL 베스트 5(2010년)와 KBL 어시스트상(2013년) 등을 받기도 했다.
"어머니의 나라는 어떤 곳일까?" 미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전씨는 한번도 가보지 못한 한국이 궁금했다.
미국을 시작으로 프랑스, 터키, 그리스, 불가라아, 크로아티아, 터키, 키프로스 등 10여개 국가의 농구 리그에서 뛰면서 모국 관심은 커져만 갔다. 어느 나라를 가든 그는 '난 한국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크로아티아 리그에서 뛰던 2007년에는 등에 태극기 문신도 새기기도 했다.
그는 "꼭 한번 한국에서 농구하고 싶었다"며 "마침 키프로스 리그에서 뛰던 시절에 KBL에서 귀화 혼혈 선수 드래프트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망설임 없이 도전장을 내밀었다"고 말했다.
미국 국적을 포기해야 했고 연봉도 3분의 1로 줄었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처음 맞닥뜨린 걸림돌은 농구 실력이 아닌 문화 차이였다.
감독과 코치진의 말에 따라야 하는 수직적인 선수단 구조는 해외 리그에서 전혀 겪어보지 못한 분위기였다.
시합이 없던 어느 날, 선수단을 집합 시켜 산을 타고 체력 훈련을 시키던 팀 코치에게 전 씨는 물었다.
"코치님, 마이클 조던이랑 르브론 제임스도 등산해서 농구 잘하는 거예요?"
마이클 조던과 르브론 제임스는 세계 최고의 농구 프로리그인 NBA(미국프로농구)를 대표한 선수들이었다.
그는 "훈련 중 이해가 안 돼서 코치진에게 질문하면 '말대꾸 하지마'라고 했다"며 "나중에는 아무 말도 안했다"고 말했다.
"농구는 창의적으로 해야 해요.
그런데 감독님과 코치님 기분 살피느라 그런 플레이 하기 힘들어요.
한국 선수들 눈치보며 농구해요.
소통 필요해요.
나이 많다고 늙은이의 은어인 '꼰대'가 아니라 젊어도 내 철학만 강요하면 꼰대에요.
나보다 동생이라도 '리스펙트'(respect·존중)하면 꼰대 안 돼요.
" 시간이 흐르면서 조직 분위기에 적응했지만 여전히 낯선 것도 있다.
한국인도, 이방인도 아니라는 귀화선수를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그는 "데뷔했을 때 신인 선수라서 (신인 상한액인) 1억원 이상을 못준다고 하더니, 신인왕 후보를 선정할 때는 '넌 귀화인이니까 자격 없다'고 하더라"며 "난 한국인인가, 외국인인가.
국내선수인가, 외국인선수인가"라고 되물었다.
"차별은 어디에나 있어요.
10곳이 넘는 나라에서 뛰면서 인종 차별을 수도 없이 겪었어요.
그중에 한국이 가장 서운했죠. 모국이고 나도 절반은 한국인이라 애정과 기대치가 커서 더 그랬나 봐요.
"
최근 전씨가 걱정하는 점은 아이들이다.
9살 첫째 아들이 국제학교에 다니는데 곧 국내 일반 초등학교로 전학시킬 예정이다.
행여 놀림이라도 당할까 걱정이 컸지만 아내가 "가족 모두 한국 사람이고, 우리도 여기서 계속 살 건데 다른 친구와 섞여 어울리는 게 맞다"며 그를 설득했다.
그는 "우리 집에서 내가 가장 한국말을 못한다"며 "작년에 태어난 셋째까지 모두 차별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릴 때 받은 상처는 깊게 오래 남으니까…"라고 털어놨다.
"유치원 다닐 때 집에 온 첫째 아들이 '아프리카가 어디야, 난 왜 까만 피부야, 난 왜 곱슬머리야'라고 연달아 물어본 적이 있어요.
어린 친구들은 디스크리미네이션(discrimination·차별) 개념 없어요.
밉지 않아요.
사회 인식이 바뀌면 괜찮아질 거라 믿어요.
"
아픔과 시행착오의 연속이던 한국 생활이지만 2009년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다시 한국행을 택할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처음에는 팬, 감독, 동료, 심지어 농구장 청소하는 아주머니까지 모든 사람이 나를 싫어하는 줄 알았어요.
그래도 여기서 내 인생 가장 큰 선물을 받았잖아요.
가족. 아내와 아이들이요.
응원하는 많은 팬까지요. 이만하면 해피엔딩이죠."
앞으로 방송 활동과 함께 개인 농구 교실을 열고 싶다는 그는 "무슨 일을 하든 솔직하게 얘기하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며 "눈치 보지 않고 이해 안 되는 점은 다 물어볼 것"이라고 환하게 웃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