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착한 부채'라는 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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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경제위기 극복 내세워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긴급재난지원금 신청률이 97%를 넘어섰다. 국민 모두에게 배정하되 30%는 신청을 포기하는 자발적 기부로 받아 제2 금모으기 운동으로 승화시키겠다는 여당 수뇌부의 허술한 계획은 일찌감치 결딴났다. 단군 이래 최대의 푸줏간 호황으로 소고기 재고는 소진됐지만 서울 종로 탑골공원 앞에서 사회복지원각의 무료급식을 기다리는 줄은 갈수록 길어진다. 취약계층에 대한 선별적 지원이 다급한데 심상정 정의당 대표는 전 국민 지원을 같은 수준으로 다시 시행할 것을 주장한다.
나랏빚 생각 않고 '세금 퍼주기'
국가신용등급 강등 위험 높일 뿐
국채발행 늘려 나눠주기보다
규제완화와 세금인하로
투자 촉진해 고용위기 해결해야
이만우 < 고려대 경영대 명예교수 >
대통령과 국무총리 및 장관이 앞장서 기부 분위기를 조성했으나 반응은 쌀쌀했다. 필자도 SNS에서 16.5%의 세액공제를 내세우며 기부를 강조했으나 부정적 댓글만 잔뜩 쌓였다. 최문순 강원지사는 지역경제가 더 중요하다며 기부하지 말고 모두 쓸 것을 독려하면서 자신은 발모제 구입에 사용해 탈모를 긴급재난 반열에 올려놨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소득 하위 70%’로 제한하자는 주장을 계속하자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해임 건의를 들먹이며 억눌렀다. 기부 부진을 예상한 예산당국은 정상적 세외수입 처리 대신 고용보험기금 편입이라는 꼼수로 대처했다.국채 발행에 의한 추경 반복으로 국가채무비율 증가 속도가 가파르고 국가신용등급 강등 위험은 고조되고 있다. 한국은행의 국채 추가 인수는 연간 화폐 발행액 증가분인 10조원으로 끝내야 한다. 미국 중앙은행(Fed)을 제외한 각국 중앙은행의 발권력 활용에는 제약이 많다. 유럽중앙은행(ECB)은 독립적으로 재정정책을 운용하는 남유럽 국가의 채무 폭증으로 유로화 붕괴 위험에 부딪혔다. 일본은 국가채무비율이 한국보다 훨씬 높다. 그러나 대부분 국채가 국내 보유분이고 외국인 주식 보유 비율도 30% 미만이다. 한국은 기축통화국이 아니면서 수출의존도와 외국인 주식 보유 비중 및 변동성이 매우 높아 외환관리 부담이 막중하다. 2019년 말 외환보유액은 한은 자산총액의 76%를 차지했고 양적완화 여력은 미약하기 짝이 없다. 국채 발행을 늘려 전 국민에게 나눠주기보다 규제완화와 세금 인하를 매개로 기업 투자를 촉진해 고용위기부터 해결해야 한다.
셰익스피어가 1600년 발간한 희곡 《베니스의 상인》의 소재는 ‘빚’이다. “전 재산이 혈관 속을 흐르는 피뿐”이라고 고백하는 바사니오는 구혼을 위한 여행비용이 다급했다. 유대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에게 빌리려 하자 보증을 요구했고 친구인 해운업자 안토니오가 나섰다. 샤일록은 기한을 어기면 1파운드의 생살을 도려내도 좋다는 서약을 요구했고 안토니오는 운항 중인 선박이 도착하면 돈이 넘친다며 이를 거만하게 수용했다. 선박이 암초에 부딪쳐 침몰하는 사고로 그는 기한을 지키지 못했고 샤일록은 서약 집행을 요구했다. 재판관이 피는 한 방울도 흘릴 수 없고 정확히 1파운드의 생살만 떼어내도록 명령하자 샤일록은 집행을 포기했다. 재판관은 시민의 생명을 위협한 죄를 물어 샤일록의 전 재산을 몰수하고 목숨만 보전하도록 판결했다. 결국 권선징악 판타지로 끝났지만 초반의 돈거래는 매우 현실적이고 교훈을 담고 있다. 현저한 항해 위험과 목숨에 대한 위협을 가볍게 평가했던 안토니오는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위기에서 겨우 벗어났다.
빚은 무서운 짐이다. 저금리 시대엔 이자 부담이 적지만 이자 낼 돈을 벌기도 힘들다. 여행비용이나 긴급재난지원금 같은 소비성 차입은 갚기가 더욱 어렵다. 투자자·채권자는 자금이 제대로 순환될 땐 좋은 친구지만 회수불능 위험에 직면하면 냉혈한으로 돌변한다. 하락률이 기준을 초과하면 예외 없이 처분하는 로스 컷(loss cut)은 칼날 같고, 건전성 비율이 기준 이하로 악화되면 발생하는 부채약관(debt covenant)에 따른 일시상환 요구는 총알 같다. 국가신용도 하락으로 외국인이 투자를 한꺼번에 회수하면 외환위기 재발을 막을 수 없다. 정치권이 띄우는 ‘착한 부채’는 허상이다. “재정을 쌓아두면 썩는다”는 논평도 쌓이는 것은 ‘재정이 아니라 빚’인 점을 호도하는 억지다. 경제를 잘 알 것 같지 않은 정치인이 심장을 걸듯이 목청을 높이는 ‘빚 찬양’은 두고두고 경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