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 유럽형 기본소득의 오해와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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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 개편과 근로의욕 고취가 목적국내 정치권에서 기본소득(basic income) 도입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는 가운데 새삼 주목받는 나라가 있다. 북유럽의 핀란드와 네덜란드다. 전 세계에서 드물게 정부 차원에서 기본소득 실험을 한 국가이기 때문이다. 이재명 경기지사를 비롯한 기본소득 찬성론자들이 그동안 벤치마킹 사례로 자주 언급한 나라이기도 하다.
국내서도 도입 앞서 '실험' 필요
강경민 런던 특파원
핀란드와 네덜란드가 기본소득 실험에 나섰던 건 분명한 사실이다. 다만 국내에서 논의되고 있는 ‘일반적인’ 기본소득과는 개념과 도입 취지가 전혀 달랐다.핀란드 중앙정부는 2017~2018년, 네덜란드 지방정부인 위트레흐트시는 2018~2019년 기본소득 실험을 했다. 두 나라 모두 기존 복지체계 개편에 대한 필요성에 따라 시작했다. 실업부조 등 현 복지체계가 노동 의욕을 훼손하고 있다는 문제 제기에서 출발했다. 복지 지출은 줄이되 근로 의욕을 고취시켜 노동시장의 공급을 늘릴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목표였다.
국내에선 기본소득의 효과로 소비 진작을 통한 수요 창출 등을 제시하고 있다. 이를 근거로 이 지사는 기본소득을 복지가 아니라 경제 정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정치권에서 논의되는 기본소득의 실체조차 불분명한 상황에서 이 지사의 주장을 평가하기는 이르다. 분명한 것은 벤치마킹 사례로 소개된 핀란드와 네덜란드의 기본소득은 복지체계 개편과 근로 의욕 고취를 위한 정책이었다는 점이다.
기본소득 실험 결과를 놓고서도 해석이 분분하다. 핀란드 정부는 2년에 걸친 실증 결과를 지난달 6일 공개했다. 월 560유로(약 76만원)를 받은 기본소득 수급자는 대조군(실업수당 받는 실업자) 대비 근로일수가 연간 6.3일(8%) 많았을 뿐이다. 이를 근거로 핀란드 정부는 ‘실업자들의 취업과 기본소득 간 상관관계를 찾을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정작 국내 일부 언론과 시민단체는 핀란드 정부와 정반대 해석을 내놨다. 기본소득이 근로 의욕을 고취시켜 근로일수를 8% 증가시키는 데 역할을 했다는 주장이다.이런 해석은 실험 설계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다. 핀란드에선 실업자들이 취업하면 실업수당 등 각종 수당이 줄면서 한계실효세율이 대폭 높아진다. 이번 실험 대상이던 실업자들은 취업 후 기본소득을 계속 받고 한계실효세율도 절반까지 낮아지도록 설계됐다. 취업 후 세후 소득이 대조군보다 100%가량 많았다. 이를 근거로 정부는 기본소득 수급자들이 대조군보다 연 50%가량 더 일할 것이라고 추정했다. 하지만 결과는 8% 높아지는 데 그쳤다. 정부가 ‘제도 효과가 없었다’고 결론 내린 배경이다.
기본소득 실험의 한계는 뚜렷하지만 시사점도 명확하다. ‘복지 천국’으로 불리는 두 나라가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실험을 계속했다는 건 기본소득의 효과를 확신하지 못했다는 의미다.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권이 기본소득 도입을 앞다퉈 요구하는 상황에서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다.
핀란드 정부의 실험 기간은 준비 기간을 합하면 총 5년에 달한다. 실험에만 2000만유로(약 274억원)의 예산이 투입됐다. 우리 정치권이 기본소득 도입을 심각하게 고려한다면 이 정도 시간과 돈 쓰는 걸 주저할 필요는 없다. 제도를 일단 도입하면 매년 최소 수십조원에서 수백조원의 예산이 소요될 것이기 때문이다. 긴 실험 결과 기본소득 효과를 확신할 수 없다면, 실험 예산은 향후 국가 재정을 위기에서 구한 뜻깊은 돈으로 기억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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