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만 녹색 구호"…코로나19로 뒷전 밀린 그린딜

유럽연합(EU)이 기후변화 대응을 위해 추진하고 있는 녹색정책(그린딜)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이 코로나19로 타격을 받은 기업들에게 자금을 지원하는 과정에서 당초 합의한 ‘저탄소 녹색조건’을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8일(현지시간) “화석연료업종에 대한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의 구제금융이 잇따르면서 그린딜이 위기에 빠졌다”고 보도했다. EU 관련 전문매체인 유랙티브닷컴도 “각국 정부가 그린딜을 강조하면서도 녹색산업 투자는 외면하는 등 미사어구만 늘어놓고 있다”고 지적했다.가디언은 시장조사업체인 블룸버그NEF의 조사를 인용해 지금까지 전 세계 정부가 발표한 코로나19 경기부양자금의 95% 이상이 탄소배출이 많은 업종에 지원됐다고 분석했다. 항공과 자동차 및 석유회사 등 탄소배출이 많은 업종에 지원된 전체 자금지원 규모는 5090억달러(약 611조3000억원)다. 반면 재생에너지 등 녹색산업엔 전체의 2.4%인 123억달러(14조7700억원)가 지원되는데 그쳤다.

유럽을 이끄는 두 축인 EU 집행위원회와 유럽중앙은행(ECB)은 지난해 말부터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녹색정책을 최우선 과제로 추진하고 있다. 지난해 말 잇따라 취임한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과 크리스틴 라가르드 ECB 총재는 녹색정책을 올해 최우선 핵심 추진과제로 제시했다.

목표는 오는 2050년까지 실질적인 탄소 순배출 총량을 ‘0’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해 태양광 등 재생에너지 분야 기업에겐 대출 규제를 완화해주고, 화석연료 사업에 대한 지원은 대폭 줄이는 등 녹색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ECB의 통화정책을 활용해 재생에너지 분야 기업 채권을 대거 매입하는 이른바 ‘녹색 양적완화’도 적극 추진하기로 했다. 하지만 코로나19의 급격한 확산으로 유럽 경제가 막대한 타격을 받으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유럽 경제의 핵심인 항공과 자동차산업 등이 코로나19로 막대한 타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항공과 자동차산업은 유럽에서 탄소배출량이 많은 분야로 꼽힌다. 각국 정부가 자국 기업과 일자리를 살리기 위해 당초 합의한 그린딜의 원칙을 외면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가디언은 ECB조차도 석유회사를 비롯한 탄소배출 업종에 2200억유로 가량의 대출을 내주고 있다고 지적했다.

더욱이 각국 정부는 이들 기업에 구제금융 자금을 지원하면서 저탄소 녹색조건(green strings)도 부과하지 않았다. 저탄소 녹색조건은 정부 구제금융을 받는 기업들이 그 대가로 탄소배출량을 얼마나 줄이고, 재생에너지 사용을 얼마나 늘릴지를 명시한 조건이다.

다만 EU 집행위는 회원국들에게 지원되는 7500억유로의 코로나19 기금은 녹색조건을 제시하겠다는 계획이다. 지원 전제조건으로 재생에너지 등 저탄소 업종에 기금을 우선 지원해야 한다는 뜻이다.다만 녹색조건 등을 비롯해 자금 지원여부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갈등이 적지 않을 전망이다. 기금 지원을 희망하는 회원국들은 집행위에 자금 신청을 해야 한다. 지원 여부는 27개 회원국의 다수결 투표로 결정된다.

런던=강경민 특파원 kkm1026@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