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38조원…헤지펀드들 '홍콩 대탈출'

"보안법 시행땐 그저 그런 도시"
109조원 굴리는 420개 헤지펀드
상당수 인근 싱가포르로 이탈
중국이 ‘홍콩 국가보안법(홍콩보안법)’ 제정을 강행하면서 홍콩에서 자본 이탈이 본격화하고 있다. 헤지펀드가 홍콩을 빠져나가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고 홍콩 시민들의 해외 은행계좌 개설 문의도 쏟아지고 있다. 외국으로 이민을 떠나려는 전문직 종사자도 증가하는 추세다.

9일 파이낸셜타임스 등에 따르면 지난해 ‘범죄인 인도법 개정안(송환법)’ 반대 시위로 홍역을 치른 홍콩이 최근 홍콩보안법 제정이란 정치적 소용돌이에 다시 휩싸이며 헤지펀드의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홍콩보안법은 외국 세력의 홍콩 내정 개입과 국가 분열, 정권 전복, 테러리즘 행위 등을 금지·처벌하고 홍콩 내에 이를 집행할 기관을 설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미국은 이에 맞서 홍콩에 대한 특별지위를 박탈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홍콩에 본사를 둔 헤지펀드들은 미국의 조치가 시행되면 아시아 금융 허브로서 홍콩의 위상이 훼손될 것으로 보고 영업을 중단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 헤지펀드업계 관계자는 “보안법이 시행되면 홍콩은 중국의 여러 도시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할 것”이라며 “상당수 헤지펀드가 싱가포르로 옮기려고 한다”고 전했다.

조사업체 유레카헤지에 따르면 현재 홍콩에서 영업 중인 헤지펀드는 420곳으로 경쟁 도시인 싱가포르보다 약 80곳 많다. 이들이 운용하는 자금 규모는 총 910억달러(약 109조원)로 싱가포르, 일본, 호주를 합친 것보다 많다.올 들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확산하면서 홍콩 헤지펀드에선 이미 대규모 자금이 이탈했다. 지난 4월까지 310억달러가 빠져나갔다. 이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최대 규모다. 설립 초기 단계인 헤지펀드에서 자금 이탈이 심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영국계 금융회사인 HSBC와 스탠다드차타드(SC)에는 홍콩 시민의 해외 계좌 개설 문의가 이전보다 25∼30% 증가했다. 이들은 싱가포르와 영국, 호주, 대만 등에 새로 계좌를 만들고 싶다고 요청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HSBC에 해외 계좌 개설을 문의했다는 메이찬 씨는 “홍콩달러를 자유롭게 환전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게 가장 큰 걱정”이라고 했다.

전문직 종사자 등을 비롯한 인재 유출 우려도 커지고 있다. 임상 간호사로 일하는 조리 씨는 “작년 호주 정부에 전문직 비자를 신청했는데 최근 그 절차를 서두르고 있다”며 “더 이상 홍콩은 우리 가족이 살기에 안전한 곳이 아니다”고 말했다. 채용 컨설턴트인 마크 프란시스는 “싱가포르가 이민 희망자의 우선 고려 지역이고 미국 호주 등이 뒤를 잇고 있다”며 “단기적으로 대규모 인재 유출이 일어나지는 않겠지만 그 추세는 갈수록 뚜렷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한편 코로나19 확산세가 진정 국면에 접어들자 홍콩 정부는 입국 통제를 완화하는 등 경제활동 재개에 속도를 내고 있다. 우선 텐센트와 알리바바, AIA, HSBC 등 홍콩거래소에 상장한 480개 기업을 대상으로 입국 후 14일 의무격리 조치를 해제하기로 했다. 다만 매달 두 명의 임원이나 관리자에게만 적용한다.

베이징=강동균 특파원 kd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