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알고] 갑질인줄 알지만…받아주고 혼자 삭였다

뉴스래빗 #팩트알고 : 대한민국 갑질
③편 갑질 피해 대책 부족한 한국 사회

▽ 신체·경제보다 '정신 피해' 더 호소
▽ 피해자 10명 중 5명, 개인적 처리
▽ 갑질이라도…60%, 소비자 요구 수용
▽ "사내 피해 교육·매뉴얼 없다" 토로
▽ 갑질 피해 구제 장치 마련해야
사진=게티이미지뱅크
[편집자 주] 서울 강북구 소재 한 아파트의 경비원 최모씨가 2020년 5월 10일 극단적 선택을 했습니다. 최씨는 유서를 통해 "억울하다"고 호소했습니다. 해당 아파트 입주민이 2020년 5월 11일 올린 국민청원('저희 아파트 경비아저씨의 억울함을 풀어주세요...')에는 5월 28일 현재 43만여명이 동의한 상태입니다. 경찰이 가해자로 지목된 입주민을 불러 조사했지만, 혐의를 대부분 부인했다고 합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우리 사회의 '갑질' 현실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습니다. '갑질'은 수 년 전부터 끊임 없이 사회적 논란거리였습니다. 외신이 발음을 그대로 쓴 'gapjil'로 써 조명할 정도죠. 이미 만연한 사회 현상이지만 명확한 정의도, 해결 방안도 없는 상황입니다.뉴스래빗이 형사정책연구원의 '소비자 '갑질' 폭력에 대한 피해조사 연구' 보고서를 통해 갑질이 무엇인지 정의하고, 우리 사회의 현실을 조명합니다. 대한민국 갑질의 실제 모습을 조명하는 [팩트알고] 갑질 특집입니다. 10여년 전부터 국내 연구들이 정의한 '갑질'이란 무엇인지, 보고서에 수록된 다양한 정의를 살펴봅니다. 소비자 갑질 피해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인터뷰 결과도 소개합니다.
뉴스래빗은 [팩트알고] 시리즈를 통해 대한민국 갑질의 현실을 3편에 나눠 조명하고 있습니다.


이전 기사

① [팩트알고] 경비원 갑질에 화난 당신…'콜센터 여직원'에겐 친절했나요?
② [팩트알고] 1년 지나 "반품" 집어던져…'갑질' 약자의 일상
앞선 기사에서 확인해보니 '갑질'은 특이한 상황이 아니라 일상 속에 있었습니다. 모욕적인 비난과 욕설, 성희롱, 위협과 괴롭힘, 차별대우, 물리적 신체 접촉(폭력) 등 종류도 다양하죠.

이 중에서도 피해자들은 모욕적인 비난과 욕설을 가장 많이 경험했습니다. 1063명을 설문조사했더니 이 중 891명, 83.8%가 '경험이 있다'고 밝혔습니다.
모욕적 비난과 욕설 "제가 실수한 것도 없는데 (고객이) 욕하고 '신입사원이지? 인사 똑바로 안 하냐 새X야. 와서 그딴 식으로 할 거면 때려쳐라'고 굉장히 모욕적으로... 욕을 심하게 했었어요"
성희롱 "전화 상담을 하면서 정신적인 부분에서 가장 스트레스가 크죠. (...) '잠이 안 와서 그러는데 잘 자요 한 마디만 해달라'고 하시는 분도 있고, 이런 경우에도 해줄 수밖에 없어요. 욕설이 아니니까 저희가 먼저 못 끊잖아요. 그리고 저희 상품 중에 성인 채널들이 있는데 '어떤 게 더 진해?', '어떤 게 어떤 스타일이야?' 하면서 물어봐요"
차별대우 "(...) 술에 엄청 취한 남자분이 들어오셔서 (여직원이) 영업 끝났다고 말씀드리니까 '그래도 한 잔만 팔아라' 이런 식으로 말씀하셔서 그 친구가 이미 머신도 다 정리했으니 어려울 것 같다고 죄송하다고 말씀을 드렸대요. (...) 나중에 제가 가보니까 그 남자분이 여직원한테 거의 쌍욕을 하시면서 멱살을 잡으려고 하시더라고요. 그러다가 제가 들어온 걸 보시곤 그 남자분이 갑자기 말투가 바뀌더니 그냥 나가버리시더라고요"
사례를 보니 커피숍, 세차장, 전화 상담, 인터넷 쇼핑 등 소비자라면 누구나 자주 가는 곳에서 갑질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피해자는 상처를 입었는데 가해자는 모른다거나, 보상 등을 노리고 악의적으로 갑질을 일삼기도 합니다. 더 많은 사례는 [팩트알고] 지난 편에 소개돼 있습니다.

그렇다면 서비스업, 판매업 종사자들은 '소비자 갑질'로 인해 어떤 피해를 입고 있을까요.
이렇게 분석했습니다형사정책연구원은 2019년 12월 <소비자 '갑질' 폭력에 대한 피해조사 연구>란 제목의 연구보고서를 발간했다. 이 보고서는 그간 체감으로만 느껴왔던 '갑질'을 구체적으로 정의한 기존 연구들을 소개하고, 직접 수행한 설문조사와 표적집단면접조사(focus group interview, 이하 '인터뷰') 결과도 수록했다.

설문조사는 종사자 1000명을 대상으로 소비자 갑질 피해 관련 문항에 답하게 한 결과다. 20여명 규모의 인터뷰는 소비자를 상대로 하는 서비스업, 판매업 등의 종사자에게 갑질 피해 경험을 더 깊게 물은 '심화판'이다. 인터뷰 대상자들이 직접 낸 목소리도 수록돼 있다.
갑질 피해자, 어떤 고통을 겪나?
갑질 피해자는 주로 '정신적 고통'을 겪습니다. 설문조사 결과 신체적, 경제적 피해보다 심각도가 크게 높은 것으로 나타납니다.




보고서는 갑질 피해를 1점(피해 없음)부터 4점(매우 심각한 피해)까지 4점으로 나눠 심각도를 물었는데요. 1063명이 답한 점수를 평균내보면 정신적 피해가 셋 중 가장 높습니다. 2.61로 '심각한 피해'에 가깝습니다. 경제적 피해는 1.71, 신체적 피해는 1.58로 '경미한 피해' 수준입니다.


심각도가 가장 높은 정신적 피해의 경우, '피해 없음'을 선택한 응답자는 3.8%에 불과했습니다. 96.2%가 갑질로 인해 크고 작은 정신적 피해를 겪어봤다는 뜻이죠.

정신적 피해가 심각한 수준이었다는 대답도 비중이 유독 높았습니다. '매우 심각(15.5%)'과 '심각(34.1%)'을 합하면 49.6%로 절반에 달하죠. '매우 심각'과 '심각'의 합이 신체적 피해는 8.9%, 경제적 피해는 15% 수준인 점과 대조됩니다.
갑질 피해, 어떻게 처리하나?
소비자 갑질을 당한 종사자들은, 주로 개인적으로 피해에 대처합니다.




갑질을 당해본 1063명 중 57.7%가 "개인이 단독으로 처리했다"고 응답했습니다. 10명 중 6명 꼴입니다. 동료나 상사의 도움을 받았다는 응답이 29.6%로 뒤를 이었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지만, 이 또한 개인 단위의 해결 방식입니다.

혼자서, 혹은 주변인의 도움을 받아 개인적으로 해결한 경우가 10명 중 9명인 셈입니다. 회사나 외부 기관의 도움을 받은 경우는 10.7%에 불과했습니다.




피해자들은 갑질을 당했을 때, 소비자의 요구를 일부든 전부든 수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갑질 피해시 마무리 유형을 조사한 결과, '소비자의 요구 일부 수용'이 45.2%로 가장 많았습니다. '전부 수용'이 15.1%로 뒤를 이었죠. 둘을 합하면, 10명 중 6명이 소비자의 요구를 수용했다는 뜻입니다. 소비자가 '갑질'이라 느낄 만한 행동을 했더라도, 일단 불만 제기가 들어왔으면 전부든 일부든 수용할 수밖에 없는 현실인 셈입니다.




치료가 필요한 피해에 대해서도 '아무 조치를 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10명 중 8명에 가까웠습니다. 병원에 가거나(10.8%), 약국에 가는(9.1%) 경우도 있긴 하지만 비중이 높진 않습니다.
종사자 65.5% "심각하다" 느끼지만…
교육도, 매뉴얼도 "없다"
뉴스래빗이 살펴보니 종사자들은 '소비자 갑질'로 정신적 피해를 가장 크게 입고 있었습니다. 갑질 내용에 대해서는 일단 "(일부든 전부든) 요구를 수용"하며, 피해는 "개인이 단독으로 처리"하고 있습니다.




설문에 응답한 1000명의 종사자 중 65.5%는 소비자 갑질이 '심각하다'고 답했습니다. 이보다 더한 '매우 심각하다'(24.2%)까지 합하면 89.7%에 달합니다. 소비자 갑질의 심각성이 일부 종사자에 한하는 이야기가 아니란 뜻이죠.




반면 서비스직, 판매직 종사자들이 근무하고 있는 회사의 경우 교육도, 매뉴얼도 없는 현실입니다.

회사에서 소비자 갑질 관련 교육을 받은 적이 있냐는 질문에 53.7%가 "전혀 없다"고 답했습니다. "가끔 받는다"는 37.8%를 제외하면 교육이 잦은 곳은 8.5%에 불과합니다.

갑질에 대응하기 위한 매뉴얼이 존재하냐는 질문에도 절반 이상이 "없다"고 답했습니다. 회사에 소비자 갑질 대응 매뉴얼이 존재한다고 답한 종사자는 1000명 중 313명(31.3%)에 불과합니다. 다만 매뉴얼이 있는 경우에는 해당 매뉴얼이 '적절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61.7%로 많았습니다.




설문에 참여한 1000명의 종사자들은 이를 '스스로는 잘 대응하고 있지만, 회사의 근로자 보호 인식은 적절하지 않은 편'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갑질 대응에 대한 질문에는 61.2%가 '적절하게 대응하고 있다'고 답한 한편, 회사의 근로자 보호 인식은 '별로 적절하지 않다'(43.2%)고 가장 많이 답했습니다.
경비원이 근무하던 서울 강북구의 한 아파트 경비초소의 모습/사진=뉴스1
2020년 5월 서울 성북구 소재 한 아파트의 경비원 최모씨가 극단적 선택을 한 이유도 '소비자 갑질'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종사자(경비원)를 소비자(가해 입주민)가 괴롭혔다는 점에서 소비자 갑질의 일종이라 할 수 있죠. 유족이 공개한 문자메시지에는 가해자가 최씨를 머슴 취급하며 비꼬는 내용이 담겨있었다고 합니다. 최씨는 유서에 "억울하다"는 취지로 울분을 토했습니다.

연구보고서를 통해 피해자의 목소리를 들어보니, 온 사회가 분노했던 이 '소비자 갑질'은 경비원만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종사자 1000여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도 대부분이 피해를 경험해봤다고 답했습니다. 대부분 정신적 피해이지만, 일단 불만이 접수되면 일부든 전부든 들어주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피해를 당한 종사자는 회사나 관련 기관의 도움을 받기보단 혼자서 해결하고 있는 점도 문제입니다.

'경비원 갑질' 사건에 크게 분노한 한국 사회에, 분노와 공감 이상의 해결책은 아직 없는 현실입니다. 경비원 최씨와 같은 피해자가 더 이상은 발생하지 않도록, 기업과 사회 모두 안전장치를 마련해야 할 때입니다.
# 팩트알고[팩트알고]는 뉴스래빗 팩트체크 기반 설명형(explanation) 콘텐츠입니다. 참 또는 거짓으로 양분할 수 없는 수많은 사회 문제를 질문답변 형식으로 풀어드립니다. 데이터 저널리즘에 기반한 설명과, 몰입감을 더하는 인터랙티브 시각화도 함께 제공합니다. 뉴스래빗이 지난 2018년부터 기획·개발·디자인을 더해 시작한 [알고] 시리즈의 최종판입니다.

책임= 김민성, 연구= 강종구 한경닷컴 기자 jonggu@hankyung.com
뉴스래빗 페이스북 facebook.com/newslabit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newsla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