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묘하게 산업은행 '협박'하는 HDC현산의 편지 속 한 마디

사진=연합뉴스
HDC현대산업개발이 아시아나항공 인수 의지에 변함이 없다는 뜻을 밝히면서 산업은행 등 채권단과 인수 조건 재협상의 물꼬가 트였지만 법조계와 업계에서는 여전히 계약 파기 가능성이 흘러나온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지난 9일 HDC현산이 보도자료에서 ‘중대한 부정적 영향’이란 표현을 사용한 게 예사롭지 않다는 분석을 내놓는다. 인수 의지를 확고히 한 것처럼 하면서도 계약 파기 가능성을 열어뒀다는 얘기다. HDC현산은 당시 보도자료에 “HDC현산은 산업은행에 아시아나항공 인수 의지에 변함이 없음을 밝힌다”며 “인수상황 재점검 및 인수조건 재협의 등 산업은행 및 계약 당사자들 간의 진정성 있는 노력을 통해 인수가 성공적으로 종결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아시아나항공을 인수하겠다는 쪽에 방점이 찍혀 있는 표현이다.

하지만 인수합병(M&A) 분야의 한 전문 변호사는 “보도자료를 자세히 읽어보면 HDC현산의 인수 의사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평가했다. ‘중대한 부정적인 변경(Material Adverse Change·MAC)’이라는 언급이 담겨 있다는 이유에서다.

HDC현산은 보도자료에서 “인수 계약 체결일 이후, 계약을 체결할 당시에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인수에 중대한 부정적 영향을 초래하는 것은 물론 인수 가치를 현저히 훼손하는 여러 상황들이 명백히 발생되고 확인된 바 있다”고 적시했다. 일상생활에서 ‘중대한 부정적 영향’은 상황을 심각하게 변할 수 있는 영향이라는 정도로 쓸 수 있지만 법률적으로 매우 다르게 사용된다.

M&A 계약서에는 ‘중대한 부정적 변경’이라는 표현이 거의 빠지지 않고 들어가는데 매수자를 보호하기 위한 규정으로 해석되고 계약을 되돌릴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중대한 부정적 영향’이 인정되면 계약 해제가 가능하고 매수자는 계약금까지 돌려받을 수 있다.

HDC현산이 보도자료에 ‘중대한 부정적 영향’을 초래하는 상황들이 확인됐다는 표현을 넣은 것은 아시아나항공을 매수하지 않을 수 있다는 일종의 ‘협박’이라는 게 법조계의 평가다. 채권단 내부에서도 현재 칼자루를 쥐고 있는 쪽이 HDC현산이라는 데는 별다른 이견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채권단이 인수 조건을 얼마나 완화해 줄지에 관심이 모아지는 이유다.

금융권 관계자는 “HDC현산이 겉으로는 계약 의지를 밝히면서도 계약 파기를 암시하는 양면전술로 채권단을 압박하는 모양새”라며 “채권단으로서는 인수 조건을 완화해줘야 하는 부담이 크게 생겼다”고 말했다.

다만 HDC현산이 ‘중대한 부정적 영향’을 이유로 계약을 파기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확신하기 어렵다는 의견이 많다.하버드 로스쿨의 기업지배구조 포럼도 “중대한 부정적 영향은 아주 제한적으로만 해석되고 인정을 해주는 기준도 높다”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영향에 대한 부분도 중대한 부정적 영향에 포함되는지 알 수 없다”고 해석했다.

‘중대한 부정적 영향’을 근거로 휘두르는 HDC현산의 ‘칼끝’이 얼마나 매서울지 알기 어렵다는 분석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채권단은 양보를 너무 많이 하면 특혜시비에 휘말릴 수도 있다.

채권단 내부에서는 HDC현산이 인수를 포기하면 국유화하겠다는 방안까지 포함해 다양한 대안을 고려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양측이 모두 벼랑끝 전술을 감안하고 있다는 의미다.

업계 관계자는 “채권단은 법정다툼을 벌이더라도 크게 불리할 것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현실적으로 가장 좋은 해법은 HDC현산의 요구를 적절해 받아주고 매각을 매듭짓는 것이라고 판단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HDC현산과 아시아나항공의 계약 내용을 상당히 알고 있다는 한 인사는 “‘중대한 부정적 영향’은 인정을 받기가 쉽지 않다”며 “일반적인 M&A 계약 수준보다 계약 파기를 아주 어렵게 하는 조항들이 포함돼있어서 법원에 가면 HDC현산에게 오히려 불리할 수도 있다”고 전했다.

심지어 계약금을 떼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계약을 강제적으로 이행해야 하는 상황을 맞을 수도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 관계자는 “한화케미칼이 대우조선해양 주식(50.37%)를 6조3000억원에 인수하기로 했을 때는 계약 전에 이행보증금을 둘러싼 논쟁이었기 때문에 이미 계약이 체결된 아시아나항공 매각과는 성격이 다르다”며 “계약을 해제하는 것은 생각보다 더 어려운 싸움이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박종서 기자 cosm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