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3강에 오른 한국 AI 농업팀 '디지로그'

디지로그 팀이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한국 농업 대표팀인 '디지로그'가 '제2회 세계 인공지능(AI) 농업대회'에서 3위를 차지했다. 전세계 농업 선진국과 글로벌 기업이 첨단농업 기술을 겨루는 '농업 올림픽'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이뤄낸 것이다. 특히 농업 기술이 가장 발달한 것으로 알려진 네덜란드(1~2위)를 제외하면 가장 높은 성적을 거뒀다. 디지로그 팀의 단장인 민승규 한경대 석좌교수는 "한국형 AI 농업 기술의 발전 가능성을 봤다"고 말했다.
디지로그 팀의 팀장인 서현권 교수
◆8600㎞ 떨어진 서울서 원격 제어네덜란드 바헤닝언대가 주최하고 중국 정보기술(IT) 기업 텐센트가 후원하는 이번 대회는 지난해 9월 세계 각 국의 21개 팀이 참여했다. 이틀간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가상의 농장에서 방울토마토를 키우는 예선전을 치른 뒤, 5개 팀이 선발됐다. 디지로그팀은 예선에서 2위의 성적으로 본선에 진출했다.

5개 팀은 지난해 말부터 지난달까지 6개월간 바헤닝언대에 설치된 약 99㎡의 유리온실에서 실제 방울토마토를 재배했다. 자체 개발한 AI 기술로 작물 필요한 물, 햇빛, 비료 양 등을 모니터링했다. 한국의 디지로그팀도 바헤닝언대에 약 8600㎞ 떨어진 서울 양재동에서 노트북으로 농장 시설을 원격 제어했다. 인공지능 팀과 재배 팀을 나눠 퇴근 후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오프라인 회의, 화상 회의를 거듭했다.
지난해 9월 예선전을 치르고 있는 디지로그 팀의 모습
◆품질은 100점 만점에 103점결과는 모두를 놀라게 했다. 대회에 처음 참가할 때만 해도 디지로그팀은 "예선만 통과해도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글로벌 농기업과 국가들이 태스크포스(TF)팀을 꾸려 전폭적인 지원을 한 반면, 디지로그는 각자 다른 조직에서 한 명씩 모인 일종의 '외인구단'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개발 및 회의 필요한 모든 비용을 각자 부담했다. 한국과 선진국의 농업 기술 격차가 컸던 점도 결과를 낙관하기 어려운 이유였다. "대회 참가할 때만해도 인공지능 전문가들에게 명함이라도 돌리러 가보자는 마음이었다"라는게 민 교수의 솔직한 심경이다.

그러나 디지로그 팀이 키운 방울토마토는 글로벌 농기업의 기술을 압도했다. 이번 대회의 평가 기준은 품질·수량이 50%, 지속가능성 20%, 인공지능 전략 30%다. 디지로그는 외양과 당도(브릭스) 등 품질 부문에서 100점 만점에 103점으로 1위를 기록했다. 만점 기준보다 훨씬 좋은 품질의 방울토마토를 만들어낸 점을 주최 측이 인정한 것이다. 수확량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점 등때문에 3위에 올랐지만,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큰 성과를 이뤘다.
디지로그 팀이 네덜란드 바헤닝언 농장에 센서와 카메라를 설치하고 있다.
◆AI에 패배한 인간 농부1위는 세계적인 온실기업인 네덜란드 호헨도른이 차지했다. 2위는 네덜란드의 반도체 설계회사 IMEC였다. 4위는 한국의 농촌진흥청에 해당하는 중국농업과학원, 5위는 세계적인 농업 컨설팅회사 델피였다. 일본 대표팀은 예선에서 탈락했다. 민 교수는 "디지로그 팀은 나를 제외하면 모두 20~30대"라며 "이 젊은 인재들이 호헨도른, IMEC, 델피 등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농기업을 꺾으면서 한국 농업의 가능성을 새로 확인했다"고 말했다.

이번 대회에서 또 주목할 점은 인간 농부가 AI 기술에 패배했다는 점이다. 네덜란드의 방울토마토 명인으로 손꼽히는 농부와 네덜란드 최고의 방울토마토 연구원이 실제 재배를 했지만 5개 팀의 성적에 미치지 못했다. 지난해 오이 재배로 경쟁한 제1회 AI 농업대회에서는 마이크로소프트가 1등, 인간 농부가 2등을 차지했지만 1년 만에 상황이 달라졌다. 대회 관계자들도 지난 8일 열린 시상식에서 "이 결과를 어떻게 해석해야할지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초창기 농장의 모습. 가림막을 씌워 다른 팀이 볼 수 없도록 만들었다.
디지로그팀의 방울토마토 농장. 이 방울토마토들은 품질 부문에서 1등을 차지했다.
디지로그의 AI 기술을 통해 자라난 방울토마토.
◆'한국형 AI 농업'의 시작

디지로그팀은 단장인 민승규 교수(전 농림축산식품부 차관)와 팀장인 서현권 동아대 생명자원산업학과 교수(에이넷테크놀로지 대표)를 포함해 농업·AI 전문가 16명으로 이뤄졌다. 민 교수와 서 교수가 농기업과 AI 스타트업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삼고초려'로 한 명씩 섭외했다.

한국 농업의 혁신을 주도해온 두 사람의 간절함에 14명의 젊은 인재들이 멤버로 참여했다. 데이터 기반 농업 스타트업 아이오크롭스의 조진형 대표, 이민석 팀장, 이혜란 연구원, 심소희 연구원, 서영웅 연구원, 인공지능 스타트업 스페이스워크의 이경엽 이사, 최하경 연구원, 하정은 연구원, 문태원 서울대 박사과정, 최대근 파미너스 대표, 한광희 이지팜 연구원, 이재수 농촌진흥청 연구사, 팜에이트 김성언 차장, 정진욱 삼성전자 연구원 등이다.
이번 대회 성과는 '한국형 AI 농업' 기술을 개발할 단초가 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농업 선진국에서 개발한 AI 기술은 자국의 농업 환경에 맞춰져 있다. 가령, 시설원예 위주인 네덜란드가 개발한 농업 AI는 유리온실에 최적화돼있다. 한국 자체적으로 AI 농업 기술을 개발해야하는 이유다.민 교수는 향후 '아시아 AI 농업 대회' 개최를 준비 중이다. 아시아는 유럽과 달리 소농들이 많기 때문에 이 상황에 적합한 첨단 농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대회 주최국이 돼 아시아 농기업들이 가진 재배 데이터와 AI 알고리즘을 들여다보기 위한 목적도 있다. 민 교수는 "앞으로 스마트 농업은 생산의 자동화를 넘어 재배 과정에서 '전략의 자동화'로 넘어가게 될 것"이라며 "한국이 이 분야에서 농업 선진국보다 뛰어난 성적을 내는 날이 올 것"이라고 말했다.

김형규 기자 k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