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사태에서 주목해야할 中의 거대한 통일전선전술 [여기는 논설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자유항' 홍콩이 1997년 중국에 반환된 지 23년만에 파국을 향해 치닫고 있다. 지난해 송환법 사태에서부터 시작된 거대한 혼란은 '홍콩 국가보안법 사태'를 맞아 본토와의 극한 대립과 자본 이탈로 이어지고 있다. 올들어 4월까지 홍콩 헤지펀드에서만 310억 달러(38조원)가 빠져나갔다. 홍콩인들의 해외 은행계좌 개설 문의가 쏟아지고 있고, 전문직을 중심으로 이민 모색도 급증했다.

자본 유출입이 자유롭고, 인터넷 검열이 없으며, 영국식 사법제도의 장점을 보고 투자한 본토 부자들도 대거 돈을 빼나가고 있다. 투자 자산의 안전성을 자신할 수 없어서일 것이다. 돈도 인재도 너무 빨리 홍콩을 탈출하다보니 홍콩과 엑시트(Exit)를 합친 '헥시트'라는 말이 일상화됐다. 중국의 '보안법' 강행에 맞서 미국이 1992년부터 홍콩에 부여해 온 특별지위 박탈을 검토 중인 점이 헥시트를 가속화시키는 모양새다. 특별 지위가 사라지면 홍콩의 일국양제(하나의 국가,두개의 체제)도 막을 내릴 수 밖에 없다. 저(低)세율,자유로운 자본 이동,낮은 투자 장벽이 없다면 ‘아시아 금융허브’의 매력이 사라지고, 홍콩은 중국의 여러 도시들 가운데 하나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

일국양제가 사문화돼 자본주의 세계 관문항으로서의 홍콩의 기능이 쇠락한다면 홍콩은 물론이고 전세계 자유 진영에 중대한 실패다. 반대로 특유의 통일전선 전술에 의한 중국 공산당의 또 한번의 중대한 승리로 기록될 것이다.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일시적 연합하는 것을 말하는 통일전선전술은 공산당이 대중을 아군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위장하는 대표적인 투쟁방식이다. 중국은 1980년대 갓 개혁개방을 시작해 힘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50년간 일국양제 유지'라는 절묘한 해법으로 돌려받은지 불과 23년만에 홍콩의 중국화에 성공하게 됐다.

일국양제 방식의 얼개를 짠 주역은 '철의 여인' 마가렛 대처 영국 수상과 '중국 개혁개방의 아버지' 덩 샤오핑이다. 홍콩은 통상 홍콩이라 부르는 홍콩섬, 구룡반도, 신계의 3구역으로 나뉜다. 이중 1997년에 반환의무가 생긴 땅은 2차 아편전쟁 당시 99년간 조차한 신계였다. 홍콩섬과 구룡반도는 1·2차 아편전쟁을 통해 '영구 할양',즉 '획득'한 것이어서 영국은 국제법상 반환을 거부하고 버틸 수도 있었다. 대처 수상도 덩 샤오핑과의 협상초기에는 빅토리아섬(홍콩섬)을 고수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하지만 홍콩이 식수 야채 돼지고기 등 기본식품과 물자 공급을 중국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점이 발목을 잡았다. 신계가 반환되면 홍콩은 자체 존속이 어렵다는 판단에 영국은 전부 반환하고 50년간 체제를 보장받는 '명예퇴진'을 결정하고 말았다. 이 때 영국의 결심에 쐐기를 박은 것이 바로 덩샤오핑의 일국양제 확약이었다. 영국과 중국은 홍콩인에 의한 홍콩통치와, 외교 국방을 제외하고는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과 정치·사회 체제는 유지한다는 문서에 도장을 찍었다.

당시 대처 수상,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등은 덩 샤오핑의 지속적인 일국양제 주장에 설득당하고 말았다. 오직 대만만이 중국의 노림수를 알아챘다. 오랜 국공 내전을 거치며 중국 공산당에게 쓰라진 패배를 맛본 대만은 당시 일국양제식 반환은 중국의 통일전선전술에 불과하다며 반대했다. 결국 대만이 옳았음이 입증됐다. 일국양제 확약은 바람처럼 사라져버렸고 자유항 홍콩은 폐쇄를 각오해야 하는 상황을 맞았다. 긴 시각으로 본토에 대한 의존도를 높여나가는 '포위작전'을 구사한 특유의 통일전선 전술이 모래알 같은 서방세계를 상대로 또 한번의 결정적인 승점을 앞두고 있다. 중국의 압박이 갈수록 거세지고, 중국보다 더 지독한 북한과의 갈등이 거세지는 지금 한국이 홍콩사태를 주시해야 하는 이유다.

백광엽 논설위원 kecore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