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침] 지방([6.25전쟁 70년] 전주형무소 '민간인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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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70년] 전주형무소 '민간인 학살'…강산 7번 바뀌고 '세상 밖으로'
황방산 인근서 20~40대 34인 유해 발굴…학살 증명하듯 무릎 꿇은채 나란히 매장
좌우 이념대립 속 2천200명 학살 추정…"정부차원 진상규명·명예회복 본격화 기대" 땅 표면에서 불과 20㎝ 아래 지점.
표토를 슬쩍 걷어내자 사람 유해가 집단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유해들은 3열로 나란히 줄지어 묻혀 있었으며, 1열과 2열에서 수습된 좌우측 넓적다리뼈는 모두 산 방향으로 약간씩 벌어진 상태였다.
유해 주인이 모두 무릎으로 꿇어 앉힌 채 매장됐다는 뜻이다.
유골 주변에서는 (학살에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탄피들도 함께 발견됐다. 집단 학살시 보통 시신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할 탄피가 바로 옆에서 발견됐다는 것은 총을 쏘고 난 후 시신으로 다가와 다시 확인사살을 했다는 의미라고 전문가들은 풀이했다.
유가족이나 당시 형무관(현 교도관) 등의 진술과 증언으로만 전해지던 전북 '전주형무소 민간인 학살 사건'이 강산이 7번이나 변하고 난 뒤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전주형무소 학살 사건은 한국전쟁 당시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좌익과 우익 인사들이 번갈아 희생된 '한국 현대사의 질곡' 중 하나로 지적된다. 전주대학교 박물관측에 따르면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군과 경찰은 전주형무소 재소자 1천400여명을 좌익 관련자라는 이유로 학살했다.
이어 같은 해 9월 전주를 점령한 인민군은 다시 800여명을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반동분자로 찍어 살해했다.
이렇듯 민족 상잔의 비극 속에서 민간인 2천200여명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지만 전주형무소 학살 사건은 그동안 베일에 싸인 채 입소문으로만 회자돼 왔다. 2005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설립되며 전주형무소 학살 희생자에 대한 공식적 조사가 시작되고, 황방산 일대가 유해 발굴 우선 대상지 39곳 중 1곳으로 지정되기도 했지만, 이후 진실화해위가 별다른 성과 없이 해산되면서 조사도 흐지부지 중단됐다.
다행히 지난해 8월 전주시가 시비 1억3천500여만원을 들여 유해 발굴에 나서면서 전주형무소 학살 사건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발굴조사를 맡은 전주대 박물관은 2019년 8월∼2020년 2월 6개월 간 유해 매장 추정지 5곳 가운데 가능성이 높은 황방산과 산정동 일대를 우선 대상지로 선정해 발굴에 나섰다.
박물관측은 발굴조사에서 20∼40대 남성으로 추정되는 유해 34구를 수습했다.
유해들은 손으로 긁으면 긁힐 정도로 보존 상태가 불량했다.
훼손이 심해 정강이뼈와 위팔뼈, 두개골 등으로 겨우 개체수만 판단할 수 있을 정도였다.
박현수 전주대 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은 "현장이 훼손되거나 오랜 세월에 유해가 마모될 수 있었는데도 비교적 많은 유해가 발견됐다"고 설명했다.
형무소 재소자들이 입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죄수복 단추와 허리띠, 신발 등 유품도 다수 발굴됐다.
허리띠 버클에는 '춘'자라는 글씨가 각인됐거나 올림픽 오륜기와 복싱 장면이 새겨져 있기도 했다.
다만 오랜 세월이 흐른 탓에 유품의 주인공을 밝혀내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전주시 관계자는 "현재 유해에 대한 감식을 진행 중이지만 신원 확인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희생자가 영면할 수 있도록 유해들은 세종시 추모의 집에 안치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전주시는 올해도 황방산 일대에서 민간인 희생자 유해 발굴 사업을 이어갈 예정이다. 6.25 전쟁 발발 후 70년이란 시간이 흐른 지금 그 유가족들은 모두 칠순을 훌쩍 넘은 고령층이 됐다.
유가족들은 어릴 적 아버지나 삼촌 등 사랑하는 가족을 잃었지만, 그 가족이 어디에 묻혔는지, 언제 사망했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오랜 세월을 지내 왔다.
유가족들과 학계는 이번 유해 발굴을 시작으로 전주형무소 학살 사건의 진상이 규명되고, 정부 차원의 위령 사업이 본격화하길 바라고 있다.
성홍제(71) 전주형무소 유가족회장은 "70이 넘은 고령의 유가족들은 오랜 시간 가족의 죽음을 마음에 묻어둔 채 살아왔다"며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억울하게 죽은 희생자들의 명예가 회복돼야 한다"고 주문했다. 성 회장은 "전쟁의 비극을 잊지 않고 교훈을 삼기 위해 정부가 위령 사업을 진행하길 바라고 있다"며 "그게 국가가 유가족에게 사과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연합뉴스
황방산 인근서 20~40대 34인 유해 발굴…학살 증명하듯 무릎 꿇은채 나란히 매장
좌우 이념대립 속 2천200명 학살 추정…"정부차원 진상규명·명예회복 본격화 기대" 땅 표면에서 불과 20㎝ 아래 지점.
표토를 슬쩍 걷어내자 사람 유해가 집단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유해들은 3열로 나란히 줄지어 묻혀 있었으며, 1열과 2열에서 수습된 좌우측 넓적다리뼈는 모두 산 방향으로 약간씩 벌어진 상태였다.
유해 주인이 모두 무릎으로 꿇어 앉힌 채 매장됐다는 뜻이다.
유골 주변에서는 (학살에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탄피들도 함께 발견됐다. 집단 학살시 보통 시신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할 탄피가 바로 옆에서 발견됐다는 것은 총을 쏘고 난 후 시신으로 다가와 다시 확인사살을 했다는 의미라고 전문가들은 풀이했다.
유가족이나 당시 형무관(현 교도관) 등의 진술과 증언으로만 전해지던 전북 '전주형무소 민간인 학살 사건'이 강산이 7번이나 변하고 난 뒤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전주형무소 학살 사건은 한국전쟁 당시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좌익과 우익 인사들이 번갈아 희생된 '한국 현대사의 질곡' 중 하나로 지적된다. 전주대학교 박물관측에 따르면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군과 경찰은 전주형무소 재소자 1천400여명을 좌익 관련자라는 이유로 학살했다.
이어 같은 해 9월 전주를 점령한 인민군은 다시 800여명을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반동분자로 찍어 살해했다.
이렇듯 민족 상잔의 비극 속에서 민간인 2천200여명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지만 전주형무소 학살 사건은 그동안 베일에 싸인 채 입소문으로만 회자돼 왔다. 2005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설립되며 전주형무소 학살 희생자에 대한 공식적 조사가 시작되고, 황방산 일대가 유해 발굴 우선 대상지 39곳 중 1곳으로 지정되기도 했지만, 이후 진실화해위가 별다른 성과 없이 해산되면서 조사도 흐지부지 중단됐다.
다행히 지난해 8월 전주시가 시비 1억3천500여만원을 들여 유해 발굴에 나서면서 전주형무소 학살 사건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발굴조사를 맡은 전주대 박물관은 2019년 8월∼2020년 2월 6개월 간 유해 매장 추정지 5곳 가운데 가능성이 높은 황방산과 산정동 일대를 우선 대상지로 선정해 발굴에 나섰다.
박물관측은 발굴조사에서 20∼40대 남성으로 추정되는 유해 34구를 수습했다.
유해들은 손으로 긁으면 긁힐 정도로 보존 상태가 불량했다.
훼손이 심해 정강이뼈와 위팔뼈, 두개골 등으로 겨우 개체수만 판단할 수 있을 정도였다.
박현수 전주대 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은 "현장이 훼손되거나 오랜 세월에 유해가 마모될 수 있었는데도 비교적 많은 유해가 발견됐다"고 설명했다.
형무소 재소자들이 입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죄수복 단추와 허리띠, 신발 등 유품도 다수 발굴됐다.
허리띠 버클에는 '춘'자라는 글씨가 각인됐거나 올림픽 오륜기와 복싱 장면이 새겨져 있기도 했다.
다만 오랜 세월이 흐른 탓에 유품의 주인공을 밝혀내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전주시 관계자는 "현재 유해에 대한 감식을 진행 중이지만 신원 확인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희생자가 영면할 수 있도록 유해들은 세종시 추모의 집에 안치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전주시는 올해도 황방산 일대에서 민간인 희생자 유해 발굴 사업을 이어갈 예정이다. 6.25 전쟁 발발 후 70년이란 시간이 흐른 지금 그 유가족들은 모두 칠순을 훌쩍 넘은 고령층이 됐다.
유가족들은 어릴 적 아버지나 삼촌 등 사랑하는 가족을 잃었지만, 그 가족이 어디에 묻혔는지, 언제 사망했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오랜 세월을 지내 왔다.
유가족들과 학계는 이번 유해 발굴을 시작으로 전주형무소 학살 사건의 진상이 규명되고, 정부 차원의 위령 사업이 본격화하길 바라고 있다.
성홍제(71) 전주형무소 유가족회장은 "70이 넘은 고령의 유가족들은 오랜 시간 가족의 죽음을 마음에 묻어둔 채 살아왔다"며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억울하게 죽은 희생자들의 명예가 회복돼야 한다"고 주문했다. 성 회장은 "전쟁의 비극을 잊지 않고 교훈을 삼기 위해 정부가 위령 사업을 진행하길 바라고 있다"며 "그게 국가가 유가족에게 사과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