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내가 포기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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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주 < 한국시인협회장 tj4503@naver.com >문학 강연에서 학생들을 만나거나 풀꽃문학관에 젊은 친구들이 찾아왔을 때 내가 자주 들려주는 말이 있다. 인생에서 포기하는 일이 가장 나쁜 일이라고. 흔히 말하는 ‘3포’ 인생이 더욱 나쁜 것이라고. 왜 연애를 포기하고 결혼을 포기하고 출산을 포기하느냐고. 부디 그러지 말라고 당부하곤 한다.
하지만 정작 나는 살아오면서 스스로 포기한 일이 여럿 있다. 젊은 시절엔 그러지 못했지만 나이가 들면서 점진적으로 포기하기 시작해 이제는 여러 가지를 포기하며 살고 있다. 포기란 것은 실패이기도 하고 답답한 일이기도 하고 슬픈 일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나의 포기는 자발적인 포기다.무엇을 포기했는가? 전통적으로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 세 가지를 의식주라고 말한다. 옷과 음식과 집이다. 거기에다 현대사회로 오면서 탈것이 중요해지자 자동차를 더해 의식주행이라고들 말한다. 그만큼 세상을 살아가는 데 그 네 가지가 중요한 조건이 된다는 말이겠다.
그런데 바로 그 네 가지를 나는 포기했다. 아주 포기한 것은 아니지만 현재 상태로 만족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말하자면 자족인 셈이다. 자족은 참 좋은 것이다. 사람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 준다. ‘내가 가진 것이 이만하면 좋지 않으냐’ 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좋은 옷, 새로운 옷, 비싼 옷 입기를 소망하지 않는다. 밥도 대충 먹는다. 허기만 채우면 되지 그들먹한 음식이 내겐 해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집도 그렇다. 지금 30년 넘게 살고 있는 낡은 아파트가 나에게는 최후의 보루다. 다들 새로 지은 아파트를 찾아 이사 간다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남의 일일 뿐이다.그 대신 내가 포기하지 못한 것이 있다. 그것은 사람을 좋아하는 일이고 또 좋은 글을 쓰는 일이다. 어쩌면 그 두 가지는 서로 뿌리가 닿아 있는 일일지 모른다. 애당초 글은 사람을 좋아하고 세상을 사랑하고 자연을 아끼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정말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좋은 글이 나오지 않는다.
사람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소망이 무엇이고 사는 목적이나 보람이 도대체 무엇인가? 생각해볼 때 몇 가지가 있다. 첫째가 돈, 둘째가 사랑(또는 이성), 셋째가 권력, 넷째가 명예. 보통 사람들은 첫째나 둘째에 머물고, 조금 더 나아간 사람은 셋째까지 가고, 아주 많이 나아가는 사람은 넷째까지 간다.
그런데 나에겐 이미 앞의 세 가지가 무의미하다.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는 말이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마지막에 있는 명예.흔히들 말한다. 인간의 욕망 가운데 가장 버리기 힘든 것이 명예에 관한 것이라고. 그렇다 해도 나는 명예에 관한 욕구를 버리지 못한다. 글을 쓰는 것 자체가 명예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정이 여기까지 오고 보니 의식주행에 대해 가볍게 생각하고, 어느 만큼에서 포기하고 만족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나야말로 포기했다고 하면서 정작 중요한 문제에서는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고 욕심이 다락같이 높은 사람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