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소대가리" "요사떨더니"…北 최고 글쟁이들 솜씨였다

北 노동당 산하, 정부기관 등에 '작가'로 구성된 전담 조직
자아비판으로 다져진 北 언어습관도 영향 있을 것
"절 간의 돌부처도 웃길 추태" "국수 처먹을 때는 요사를 떨더니…"
"여우도 낯을 붉힐 비렬하고 간특한 발상", "맹물 먹고 속이 얹힌 소리같은 철면피하고 뻔뻔스러운 내용"….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동생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이 지난 17일 내놓은 담화는 원색적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의 6·15 남북공동선언 20주년 기념사를 폄하하기 위해 각종 수사들을 동원했다.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을 비롯해 세 차례에 걸친 남북한 정상회담에서 문 대통령을 미소로 맞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표현 하나하나엔 날이 서있었다.북한의 담화에는 거친 표현들이 자주 등장한다. 김여정 담화 역시 예외가 아니다. 과거엔 수위가 더 높았다. “잡쓰레기”, “인간추물”, “정신병적인 광태” 같은 육두문자가 등장하는 건 비일비재했다. 버락 오바마 미국 전 대통령에게 “아프리카 원숭이”, 70대인 트럼프에게 “늙다리 미치광이”,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시집 못 간 노처녀”라고 하는 등 인신공격도 서슴치 않았다.

비유를 통한 힐난과 조롱도 특징이다. 조선중앙통신이 19일 논평에서 청와대의 강경대응 방침을 가리켜 "절간의 돌부처도 웃길 추태"라고 한 표현이나 과거 박지원 전 의원에게 “설태 낀 혓바닥을 마구 놀려대며 구린내를 풍기었다”, 문 대통령에게 “삶은 소대가리도 앙천대소할 노릇”이라고 했던 게 대표적이다.

북한의 정예 글쟁이들북한의 가시 돋힌 담화문 뒤에는 북한 전국에서 뽑힌 '정예' 글쟁이들이 있다. 북한에는 노동당 산하의 각 조직과 외무성 같은 정부기관, 군부 등에 선전선동용 글을 쓰는 인력으로 구성된 별도 조직이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보통 수십명 단위로 이뤄진 것으로 전해진다. 이 조직에 속한 인력들은 '작가'로 불리며 글쓰기만을 전업으로 한다고 한다. 순환보직이 아닌 셈이다. 북한의 명문대 중 하나인 김형직사범대 작가양성반에서 시를 전공하고 예술선전대 작가로 활동했던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는 “북한에서는 이미 사회에 진출해 글쓰기로 인정받은 이들이 선발돼 대학에서 작가 교육을 받는다”며 “그 중에서도 김일성종합대나 김형직사범대 출신의 최고 엘리트들이 당에서 글을 쓰는 전문 인력으로 선발된다”고 말했다.

북한에서는 대외용 메시지를 쓸 때 특히 증오심을 극대화하기 위해 일부러 강한 표현을 쓰도록 하는 지침도 있다고 한다. 태영호 미래통합당 의원은 “북한에서는 미국이나 남측을 향한 비난 글을 쓸 때 ‘불타는 적개심을 가지고 펜으로 원수의 심장을 찌르는 심정으로 쓰라’고 외교관들을 교육한다”며 “은유를 써서 적대국이나 적대 인물을 향해 험한 표현을 써야 상대의 기를 죽일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북한 내부에서 글쓰기가 출세를 위한 필수 덕목인 것도 공격적인 글쓰기가 많은 이유 중 하나다. 태 의원은 “당시 통전부 부부장으로서 6·15 남북공동선언 막후 역할을 했던 송호경이라는 인물이 있는데 젊어서부터 독설과 유머, 착착 달라붙는 비유 담은 글로 이름을 날려 외무성 부상, 통전부 부부장까지 올라갔다"며 "이용호 외무상, 김계관 전 1부상, 하노이 미·북 실무 협상 시 북측 대표 김혁철 등도 대외용 글을 잘 써서 승진한 인물로 꼽힌다”고 했다.분단 이후 달라진 北 언어습관

북한의 평소 언어습관이 한국과 다른 것도 담화문이 생소하게 느껴지는 이유 중 하나라고 탈북자들은 입을 모은다. 북한은 외래어를 쓰지 않아 순우리말로 모든 어휘를 대체하다 보니 한국인에게 낯설게 느껴지는 표현들이 많다는 것이다. 노동신문이 지난달 사설에서 "외래어에 습관되면 자연히 남의 풍에 놀고 남을 넘겨다보게 되며 나아가 제국주의자들의 책동에 동조하게 된다"고 지적한 것처럼 북한은 외래어 사용을 배격한다.

추상적 개념인 관념어보다는 구체적인 형상어를 많이 쓰는 것도 북한말의 특징이다. "배가 고프다"를 "뱃가죽이 등에 붙었다"고 표현하는 식이다.북한은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공개 석상에서 말과 글을 통해 비판과 비평할 기회가 많은데, 이 과정에서 거친 표현들을 쓰는 분위기가 정착했다는 설명도 있다. 북한에서 작가 활동을 했던 <한국이 낯설어질 때 서점에 갑니다>의 저자 김주성 씨는 “북한에서는 주민들이 주기적으로 모여 자아비판과 상호비판을 하는 생활총화가 잦기 때문에 글쓰기나 웅변을 할 기회가 많은데 이 때 돋보이기 위해 자극적인 말을 한다”고 말했다.

그는 "김일성이 주로 비유적 표현을 많이 쓴다"며 "북한 당국이 이를 주민들에게 체득하게 하면서 일종의 미덕처럼 돼, 담화뿐만 아니라 각종 공문서에 비유적 표현이 많이 등장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거칠더라도 무게감은 제각각

북한 당국이 담화의 경중을 나누는 기준은 '글쓴이'와 게재 '매체'다. 비슷한 수준의 험악한 표현과 내용이라 할지라도 이에 따라 무게감이 달라진다.

가장 무게감이 적은 것은 우리민족끼리나 조선의 오늘, 메아리, 조선신보와 같은 대남선전매체의 기사로 발표되는 것이다. 북한 주민들은 이를 볼 수 없기 때문에 내부 정치적 부담이 없는 만큼 표현이 대내 매체보다 과격한 편이다. "평양에 와서 옥류관 국수를 처먹을 때는 그 무슨 큰일이나 칠 것처럼 요사를 떨고 돌아가서는 지금까지 한 일도 없다",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달나라타령" 등의 표현은 여기서 나왔다.

노동당 기관지이자 북한 주민들을 대상으로 배포되는 노동신문의 경우 북한 언론매체 중 가장 무게 있게 평가된다. 메시지를 북한 주민들에게 행동으로 증명해야 하는 부담이 있는 데다, 당의 노선을 직접 대변하기 때문이다.

당이나 정부의 성명과 담화문은 언론 매체보다 무게감이 실린다. 각 부처 산하 협회들의 발표문 또는 공개질문 형식의 논평부터 시작해 각 부처의 부상(우리의 실·국장급~차관 사이) 또는 제1부상(차관급)의 성명으로 올라가며 중요도가 높아진다.최고 수위는 공화국 성명이다. 그러나 김정은은 이 ‘전통’을 깨고 2017년 9월 22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위원회 위원장 성명’을 발표했다. 북한에서 최고 지도자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직접 성명을 낸 건 이 때가 처음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유엔총회에서 당시 북한을 맹비난한 데 대한 앙갚음적 성격이 강했다. “미국의 늙다리미치광이를 반드시, 반드시 불로 다스릴 것이다”란 말도 여기서 나왔다.

임락근 기자 rkl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