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노이 노딜' 후 김정은 약올린 트럼프…볼턴 회고록 보니 [종합]

"문 대통령, 북핵 비핵화 낙관하다 협상 실패"
"판문점 회담 문 대통령 동행, 미북 모두 원하지 않아"
정의용 "상당 사실 왜곡하고 있다"
사진=AP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회고록을 통해 남·북·미 비핵화 협상 관련 비화를 폭로했다. 회고록에 따르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하노이 노딜' 이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비행기로 북한까지 바래다주겠다"는 황당 제안까지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 대통령을 수위 높게 비판하는 내용이 다수 담긴 것으로 알려진 볼턴의 회고록 '그 일이 일어났던 방' 중 한반도 관련 부분에 나오는 내용이다. 볼턴의 회고록은 23일(현지시간) 공식 발간 예정이다.볼턴은 하노이 회담 내내 "영변 외에 추가로 내놓을 것이 없느냐"는 트럼프 대통령과 "영변이 북한에 얼마나 큰 의미인지 아느냐"는 김정은의 문답이 반복됐다고 전했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을 타격할 수 있는 장거리 미사일인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제거할 수 있겠느냐고 제안했다. 김정은은 "한 걸음씩 가면 궁극적으로 전체 그림에 도달할 것"이라며 이를 에둘러 거절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만약 영변을 받고 제재 해제하는 제안을 받아들이면 미국에선 정치적 파장이 엄청날 것"이라며 "내가 대선에 패배할 수도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김 위원장은 영변 핵시설 폐기를 내놓으면 트럼프 대통령도 양보할 것이라 기대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그럴 의도가 전혀 없었다는 얘기다. 결국 하노이 정상회담은 노딜로 끝났다. 트럼프 대통령은 화가 난 김 위원장에게 "비행기로 북한까지 바래다 주겠다"는 황당한 제안까지 했다. 김정은이 "그럴 수 없다"고 하자, 트럼프는 "상당한 '그림'이 될 것"이라며 행복하게 말했다고 볼턴은 전했다.


김정은 위원장은 하노이에서 4500㎞를 3박4일간 기차로 달려 북한으로 돌아갔다. 김정은으로선 모욕적이라 느낄 만한 상황이었다.

회고록에는 남·북·미 북핵 협상의 혼란상이 적나라하게 표현됐다. 볼턴은 문재인 대통령에 대해 중재자를 자임했지만 미·북 양측 어디도 장단을 못 맞추는 '박치'였고, 트럼프 대통령은 본인의 소리만 높이는 '음치'였다고 표현했다. 김정은 위원장은 상대의 의도를 전혀 파악하지 못했고, 제대로 된 협상 전략도 없는 '길치'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고도 했다.회고록에서 김 위원장은 1차 미북정상회담이 열린 싱가포르에서도, 2차 회담이 열린 하노이에서도 미국의 협상 전략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것으로 그려졌다. 미국은 '언제든 걸어나갈 수 있다'는 계획을 짜고 하노이 회담 전에는 결렬됐을 때 발표할 문구까지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이 미리 준비해갔다.

그 와중에 문재인 대통령은 북한 비핵화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으로 일관했다. 문 대통령은 하노이 미·북 정상회담이 결렬된 뒤 열린 지난해 4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판문점 또는 해군 군함 위에서 3차 미북 정상회담을 적극 주장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문 대통령의 말을 끊고 "다음 정상회담에선 실질적인 합의를 이루기를 바란다"며 이 제안을 거부했다.또 회고록에 따르면 작년 6월30일 오후 판문점 자유의집 앞에서 남·북·미 3자 정상이 만날 당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모두 문 대통령의 참여를 원하지 않았다고 했다. 회동 당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미국 측은 수차례 문 대통령의 참석을 거절했지만, 문 대통령은 "일단 판문점 내 관측 초소까지 같이 가자"며 동행을 요청했다는 것이다.

또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017년 12월 볼턴 전 보좌관을 백악관으로 불러 북한을 선제공격하면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이 어느 정도인지 물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볼턴은 핵·미사일 개발을 막기 위해 서울을 겨냥하고 있는 북한 장사정포에 대한 대규모 선제타격 필요성을 브리핑했다고 밝혔다. 그는 구체적으로 어떤 선제 공격 방법을 브리핑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이에 트럼프 대통령은 "(선제공격을 하면) 전쟁 가능성은 어느 정도라고 보나. 반반?"이라고 물었다. 볼턴은 "나는 모든 것은 (북한을 배후 지원하는) 중국에 달려 있다고 본다"면서도 "아마도 반반"이라고 답했다고 전했다.

볼턴은 북핵의 위험성에 대해 △김정은 위원장이 어떤 행동을 할지 예상할 수 없고 △북한이 핵으로 한·일 등에 공갈 협박을 할 수 있으며 △북한은 돈을 위해 무엇이든 팔 수 있기 때문에 '핵의 아마존(전자상거래업체)'이 될 수 있다고 했다. 핵 아마존이란 누구든 요청하면 핵기술을 팔 수 있는 확산자가 된다는 의미로 풀읻힌다.

이와 별개로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 일본 등에서 미군 주둔 비용을 올려받기 위해 미군 철수를 위협하라고 언급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볼턴은 지난해 7월 방위비 분담금 문제를 논의하러 한일 약구을 방문한 뒤 그 결과를 트럼프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당시에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한국에 연간 50억 달러를 요구했다. 일본에 대한 요구 금액은 80억 달러였다.

볼턴은 책에서 당시 정황에 대해 "트럼프는 매년 지급 비용으로 80억 달러와 50억 달러를 얻는 방법은 모든 미군을 철수한다고 협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야 매우 강한 협상 위치에 서게 된다'고 했다"고 설명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또 북한의 미사일 발사에 대한 보고를 받은 이튿날 "돈을 요구하기 좋은 때"라며 "존(볼턴)이 올해 10억 달러를 가져왔는데 미사일 때문에 50억 달러를 얻게 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볼턴은 회고록에서 "얼마나 고무적인가"라며 트럼프 대통령을 비꼬았다.

지난해 2월말 하노이 노딜 이후 같은해 4월 문재인 대통령이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도 트럼프 대통령은 50억 달러를 요구했고, 문 대통령은 한국 기업들이 미국에 투자하고 있다며 트럼프 대통령의 요구 액수는 지나치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판문점에서의 남북미 정상 회동이 이뤄진 6월30일 당일에도 청와대에서 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은 방위비 분담금 문제로 장시간 논쟁을 벌였다고 덧붙였다.

이같은 볼턴 회고록의 관련 내용이 여럿 밝혀지자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볼턴 회고록은) 정확한 사실을 반영하고 있지 않다"고 22일 밝혔다.

정 실장은 "볼턴 전 보좌관은 회고록에서 한국과 미국, 북한 정상들 간 협의 내용과 관련한 상황을 자신의 관점에서 본 것을 밝혔다. 상당 부분 사실을 크게 왜곡하고 있다"고 지적했다.윤도한 청와대 국민소통수석도 "정부간 상호 신뢰에 기초해 협의한 내용을 일방적으로 공개하는 것은 외교의 기본 원칙을 위반한 것으로 향후 협상의 신의를 매우 심각하게 훼손할 수 있다"며 "미국 정부가 이러한 위험한 사례를 방지하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기대한다"고 촉구했다.

김명일 한경닷컴 기자 mi73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