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두현의 문화살롱]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길 너머를 꿈꿔라"

■ '철도의 날' 읽는 인생시

좌절한 사람도 실연한 사람도
레일 위에선 모두가 평평하다

광속의 효율과 완행의 여유
길 위의 삶 여정과 닮았으니
힘들 땐 '희망역'행 티켓을 끊자

고두현 논설위원
서정춘 시인의 대표작 ‘죽편(竹篇) 1-여행’은 인생을 대나무와 기차에 비유한 명편이다. 허름한 여관방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다 번개같이 떠오른 시구를 벽지에 휘갈겨 썼다고 한다. ‘여기서부터, -멀다/ 칸칸마다 밤이 깊은/ 푸른 기차를 타고/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백 년이 걸린다.’

이 시의 ‘칸칸마다 밤이 깊은/ 푸른 기차’는 끝없는 인생의 여정을 닮았다. 시인은 ‘여기서부터,’라고 쉼표를 찍어 반박자 쉰 다음, 하이픈을 그어 또 호흡을 조절하면서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가 얼마나 먼지를 절묘하게 표현했다. 그는 이 시를 4년 동안 80번 이상 고쳐 쓰는 퇴고를 거쳐 대나무의 수직 이미지와 기차의 수평 이미지, 시간과 공간, 인생과 여행의 의미를 5행 37자로 응축했다.살다 보면 괴롭고 슬플 때가 많다. 일이 잘 풀리지 않아서, 상처 주는 사람이 많아서, 마음을 짓누르는 걱정거리가 넘쳐서, 앞길이 막막하고 희망이 보이지 않아서, 사랑에 실패해서…. 그럴 때 기차는 우리에게 위로의 손을 내민다.

정호승 시인은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고 말했다. ‘선암사’라는 시에서 그는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새들이 가슴 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며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고 했다.
기차역에는 온갖 사연이 깃들어 있다. 두고 온 고향과 어린 시절의 아득한 풍경, 삶의 고비마다 몸을 휘감던 회한의 물무늬가 배어 있다. 곽재구 시인의 ‘사평역에서’에는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밤 열차를 기다리는 사람들과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넣는 이의 인생이 있다.대구 수성구의 옛 고모역에는 구상 시인의 ‘고모역’ 시비가 서 있다. ‘고모역’은 6·25 때 이산가족이 되어 생사조차 모르는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쓴 시다. 시인은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만큼이나/ 머리가 희어진’ 세월 저편에서 ‘아내보다도 별로 안 늙은’ 옛적 어머니의 모습, 대문과 큰길을 넘어 ‘역까지 나오셔’ 기다리는 모습을 떠올리며 눈물을 삼킨다.

전쟁의 상흔은 지구 반대편 사람들의 가슴에도 잊을 수 없는 옹이를 남긴다. 그리스 작곡가 미키스 테오도라키스의 ‘기차는 8시에 떠나네’에는 2차 세계대전 때 나치에 맞서 유격대원으로 떠난 연인을 고향역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는 여인의 슬픈 얘기가 담겨 있다.

기차는 때로 우리 삶의 속도를 앞서기도 한다. 120여 년 전 제물포~노량진을 달리던 열차는 시속 20㎞였지만, 이제 그보다 20배나 빠른 초고속열차 시대가 됐다. 눈부신 풍요의 길이 열리고, 우리 일상의 속도와 효율이 높아졌다. 두 줄로 나란히 이어진 철로에는 광속의 시간과 함께 완행의 기억도 스며 있다.그 시간의 건널목을 만날 때면 가끔 쉬어갈 일이다. 신경림 시인은 ‘특급열차를 타고 가다가’에서 ‘이렇게 서둘러 달려갈 일이 무언가/ 환한 봄 햇살 꽃그늘 속의 설렘도 보지 못하고/ 날아가듯 달려가 내가 할 일이 무언가/ 예순에 더 몇 해를 보아온 같은 풍경과 말들/ 종착역에서도 그것들이 기다리겠지/ (…) /이르지 못한들 어떠랴 이르고자 한 곳에/ 풀씨들 날아가다 떨어져 몸을 묻은/ 산은 파랗고 강물은 저리 반짝이는데’라며 인생의 보폭을 조금만 늦춰보라고 권한다.

허영자 시인도 ‘급행열차를 놓친 것은 잘된 일이다’로 시작하는 시 ‘완행열차’에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누비듯이 혹은 홈질하듯이/ 서두름 없는 인생의 기쁨/ 하마터면 나 모를 뻔하였지’라며 ‘완행열차를 탄 것은 잘된 일’이라고 노래한다.

지금 완행열차는 없어졌지만, 삶이 버거울 땐 추억 속의 기차 여행을 떠나보자. 신발 끈을 다시 매고 ‘희망역’행 티켓을 끊자. 그 길에서 누비질하듯, 홈질하듯 생의 그늘들을 껴안아보자. 요즘처럼 시국이 어지러우면 어떤가. ‘푸른 기차를 타고’ 천천히, 촘촘히 그 길을 가다 보면 마침내 ‘대꽃이 피는 마을’에 닿을지도 모른다. 마침 내일은 ‘철도의 날’이다.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