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타에 관용은 없다" 혹독한 데스크…전화로 기사 불러도 완벽한 문법

기자시절 이낙연은…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처음부터 기자를 꿈꿨던 것은 아니다. 서울대 법학과 여느 동기들처럼 법조인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가난한 집안 사정 탓에 고시 공부는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월급이 많은 투자신탁회사에 곧장 취직한 이유다. 동아일보 기자가 된 건 “친구들이 만날 때마다 다니던 회사 이름을 다시 묻는 게 싫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28세 때 정치부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한 이 의원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울 동교동 자택을 출입했다. 거물 정치인의 집에서 정치가 이뤄지던 시절이다. 동교동계의 ‘막내’ 설훈 민주당 의원은 “원고도 없이 유선전화로 속보기사를 불러주는데 정말 완벽한 문장을 구사했다”며 “아주 부지런했으며 민완 기자였다”고 기억했다.김 전 대통령은 이 의원을 매우 아꼈다. 이 의원이 기자회견장에 없으면 티나지 않게 회견 시간을 미룰 정도였다. 1989년 평민당 총재였던 김 전 대통령은 이 의원에게 고향인 전남 영광에서 출마할 것을 권하기도 했다. 당시 동아일보 도쿄특파원에 내정됐던 이 의원은 이 제안을 사양했다. 더 큰 세계를 배우고 싶다는 꿈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이 의원은 그때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낙연 기자를 기억하는 이석현 전 민주당 의원은 “항상 간담회가 끝나면 기자들이 나간 뒤 혼자 다시 와서 이것저것 캐물었다”며 “그래서 특종을 많이 했다”고 전했다. 이 의원은 ‘전두환 정부의 금융실명제 연기’를 대표적인 특종으로 꼽았다. 한 의원으로부터는 ‘기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정치부 차장, 국제부장 등 데스크로서 이 의원은 후배들에게 혹독했다고 알려졌다. 완벽을 추구하는 성격 때문이다. 오타를 용납하지 못하는 성격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보좌진은 물론 주변 의원들이 보내온 문자에도 오자가 있으면 이를 지적한다고 한다.이 의원은 지금도 “모르는 게 많아 항상 부족하다”고 주변에 말한다. 이는 기자 때 터득한 교훈이다. 이 의원은 “죽을 때까지 공부해야 한다. 인생과 자연의 비밀은 너무 많고, 세상의 변화는 너무 빠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조미현 기자 mwis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