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정 타협 걷어찬 민주노총…그 뒤엔 '30년 계파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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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운동권 시절부터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정 대타협이 최종 합의 직전까지 갔으나 돌연 무산 분위기로 바뀌고 있다. 지난 1일 협약식을 15분 남겨놓고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이 예상치 못하게 불참 통보를 했기 때문이다.
조직 내 '뿌리 깊은 반목'
現집행부는 다수인 국민파
대의원 60%…대화 참여 무게
권영길·이수호 前 위원장 배출
이번 노사정 대타협은 민주노총이 원해서 추진된 것이다. 지난 3월 6일 사회적 대화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서 코로나19 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정 협약을 체결했다. 경사노위에 참여하지 않고 있는 민주노총은 4월 17일 뒤늦게 ‘새로운 노사정 합의’를 하자고 나섰다. 한국의 제1노총으로 민주노총도 코로나19 극복에 동참해야 한다는 게 김명환 위원장의 뜻이었다. 만약 노사정 대타협이 이뤄졌다면 외환위기 이후 22년 만에 민주노총까지 참여하는 대타협이 성사되는 것이었다.김 위원장은 하지만 강경파로부터 ‘사실상 감금’당하면서 1일 협약식에 가지 못했다. 강경파는 ‘해고 금지’ 등의 주장이 합의안에 명문화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물리적 저지에 나섰다. 2일에도 민주노총 내 강경파를 대표하는 ‘민주노동자전국회의’는 입장문을 내고 “민주노총의 주요 요구가 관철되지 않았기 때문에 합의안은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주노총 위원장은 직선제로 조합원들이 선출하지만 리더십을 발휘하기 힘든 구조다. 민주노총 내에 해묵은 계파 갈등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란 게 안팎의 분석이다. 계파 간 갈등은 민주노총이 한국 사회의 주요한 한 축으로 기능하는 것조차 막고 있다.
노동 전문가들은 민주노총 내엔 국민파, 중앙파, 현장파 등 크게 3개 계파가 있다고 진단한다. 대체로 국민파가 온건, 중앙파가 중도 온건, 현장파가 강경 성향을 띠고 있다는 전언이다.이 같은 계파는 1980년대 학생운동 때의 이념 차이에서 비롯됐다. 크게 민족해방(NL) 계열과 민중민주(PD) 계열로 나뉘며, PD 계열이 다시 갈라선 게 현재의 계파를 구성하고 있다.민주노총의 최대 계파는 국민파로 대의원의 약 60%를 차지하고 있다. 대화와 투쟁을 병행하는 대중적 노동운동 노선을 걷고 있다. ‘국민과 함께하는 노동운동’을 표방하고 있으며 국민파라는 이름도 여기서 나왔다. 대표적인 인물은 권영길 초대위원장, 이수호 전 위원장 등이다. 김명환 현 위원장도 국민파로 분류된다.
중앙파와 현장파는 ‘범좌파’로도 불리며 모두 PD 계열 이념을 갖고 있다. 그중에서도 중도 성향인 중앙파는 투쟁을 우선하되 대화도 병행하자는 주장이다. 강경 좌파인 현장파와 구분해 중도 좌파로도 표현된다. 주로 현장조직보다는 민주노총 중앙에서 활동해 중앙파라는 이름을 얻었다. 문성현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 단병호 전 위원장, 심상정 정의당 대표 등이 이 계열로 분류된다.현장파는 대의원의 10% 내외에 불과하지만 강경투쟁 노선을 견지해 선명성이 상대적으로 분명한 계파다. 이갑용 전 위원장, 유덕상 전 수석부위원장이 있다. 주로 현장 조직인 단위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활동해 현장파라고 불린다.
계파 간 노선 차이는 ‘사회적 대화 참여 여부’를 둘러싸고도 극명하게 나타난다. 국민파는 사회적 대화 참여에 적극적이다. 반면 현장파는 이른바 ‘비타협적 투쟁’을 강조한다. 정부와의 대화는 투쟁을 이끌어내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주장한다. 국민파 출신 위원장들이 사회적 대화 참여 안건을 대의원대회에 상정하면 현장파들은 물리력까지 서슴지 않는다. 대의원대회장을 점거하고 소화기 분말을 뿌려대며 폭력까지 동원한 게 2005년 이수호 위원장 때 벌어진 일이다.
문재인 정부는 민주노총에 노사정위원회 복귀 명분을 주려고 경제사회노동위원회로 노사정 대화 기구를 개편하기까지 했다. 현 김명환 위원장도 2017년 말 사회적 대화에 참여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어 당선됐다. 하지만 아직까지 강경파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경사노위 참여 안건은 대의원대회에서 번번이 부결됐다.1980년대 운동권 이념에 사로잡힌 민주노총 내 오랜 계파 대립 양상은 ‘화석’에 비유되기도 한다. 김대환 전 노동부 장관은 “민주노총과 한국 노사관계는 아직도 ‘1987년 체제’에 갇혀 있다”고 했다. 김동원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는 “코로나19 사태가 아니더라도 노동시장엔 이미 4차 산업혁명의 물결이 밀어닥쳤다”며 “민주노총도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최종석 전문위원 js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