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車 초석 놓는 정의선, 최태원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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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이노베이션 서산공장서 회동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수석부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7일 충남 서산의 SK이노베이션 공장에서 만나 전기자동차 배터리 등 미래 신기술 협업 방안을 논의했다. 배터리·정유(SK이노베이션), 커넥티드카·인공지능(SK텔레콤), 반도체(SK하이닉스)를 3대 핵심축으로 삼고 있는 SK가 현대차와 전방위 협력에 나설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정의선 "최고기술 업체와 협력"
최태원 "한국 경제에 힘 될 것"
정 수석부회장과 최 회장은 이날 SK이노베이션이 개발 중인 고에너지밀도 등 차세대 배터리 기술부터 배터리 구동시간을 늘려주는 전력반도체와 경량 신소재, 배터리 대여·교환 등 서비스 플랫폼까지 미래차 분야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SK 주유소를 활용해 전기차·수소차 충전 인프라를 확충하는 방안에 대한 의견도 교환한 것으로 알려졌다.정 수석부회장은 회동을 마친 뒤 “세계 최고 기술력을 보유한 기업들과 협업을 확대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최 회장도 “이번 협력이 두 그룹은 물론 한국 경제에도 새로운 힘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날 만남으로 4대 그룹 총수들의 ‘배터리 동맹 구축’을 위한 모임은 마무리됐다. 경제계에선 정 수석부회장이 합작사 설립 등의 형태로 각 그룹과의 협업을 구체화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심야 번개모임도 OK"…新협력 시대 연 젊은 총수들
7일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수석부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구내식당 오찬’은 한 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실무진은 30분이면 끝날 것으로 예상했지만 대화가 길어졌다. 이날 SK이노베이션 충남 서산공장에서 두 사람은 3시간30분을 함께 보냈다. 대화 주제는 미래 전기자동차 및 배터리 산업으로 무거웠지만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는 게 배석자의 전언이다. 함께 생산라인을 둘러볼 때는 최 회장이 여러 차례 농담을 건넸다고 한다. 정 수석부회장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과 만났을 때도 비슷한 분위기가 연출됐다.이날 만남으로 미래 전기차 및 배터리 분야 협업을 위한 4대 그룹 총수의 회동이 마무리됐다. 조만간 현대차와 3대 배터리 제조사가 합작회사를 세우거나 공동으로 연구개발(R&D)을 하는 등 4대 그룹 간 협업이 시작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재계에서는 사석에서 서로를 ‘형’ ‘동생’으로 부르는 총수들의 끈끈한 관계를 바탕으로 국내 대기업 간 새로운 협력모델이 제시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한동안 공개 회동 꺼렸던 총수들
창업 1세대가 활발하게 활동했던 1950~1980년대 대기업 총수들은 수시로 교류했다. 제대로 된 산업 기반이 없던 황무지에서 기업을 경영해야 한다는 막막함에 서로 의지했고, 경제계 공통 현안이 생기면 힘을 모으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는 설명이다.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와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등은 전국경제인연합회로 대표되는 경제단체를 설립하고 키우는 데 적극적이었다. 대규모 생산시설이 완공되면 다른 기업 총수가 직접 찾아가 축하해주는 ‘공장들이’ 문화도 있었다.이 회장이 1985년 정 회장의 고희연을 찾아 백자를 선물할 정도로 재계 총수들의 만남은 어색하지 않았다. 재계 관계자는 “창업주들은 기업인의 입지를 넓히거나 보다 나은 경영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일이라면 서로 발벗고 나섰다”며 “그룹 회장들이 공개적으로 만나 현안을 논의하는 일도 많았다”고 말했다. 또 서로의 사업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규칙’도 있었다.1990년대를 기점으로 분위기는 바뀌었다. 함께 힘을 모으던 창업 1세대가 하나둘 현업에서 물러났고, 재계 1·2위였던 현대와 삼성 간 사이가 멀어졌다. 삼성이 완성차 사업에 뛰어든 이후 두 기업은 거의 교류하지 않았다. 다른 그룹 총수들도 서로 만나는 횟수를 줄여갔다. 1997년 외환위기와 함께 정부 주도로 진행된 5대 그룹 간 ‘빅딜(대규모 사업교환)’은 대기업 총수들의 거리를 더 멀어지게 했다. 총수들이 빅딜 과정에서 갈등을 빚었고, 감정의 골은 한동안 메워지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언제 어디서든 만나는 젊은 총수들
이 같은 분위기는 최근 바뀌고 있다. 40~50대 젊은 총수들이 격의 없이 만나 미래 먹거리를 논의하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특정 산업이 순식간에 떠오르거나 몰락하고,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기술이 튀어나올 정도로 산업계 변화 속도가 빨라지면서다. 개별 기업이 홀로 변화의 흐름을 주도하거나 따라가기 어려워졌다는 설명이다.사업 간 경계도 모호해지고 있다. 자동차산업만 봐도 정보기술(IT), 디스플레이, 통신 등 다른 산업과 융합하고 있다. 고태봉 하이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자동차는 이제 움직이는 IT 기기가 됐다”며 “전기차 시대가 오면 배터리 제조사와의 협업도 필수적”이라고 말했다.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젊은 총수들이 전면에 등장한 결과라는 분석도 있다. 지난해 사우디아라비아의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방한했을 때 5대 그룹 총수들이 서울 한남동 승지원에서 합동 간담회를 연 게 대표적이다. 이날 간담회는 당초 계획에 없었지만 이재용 부회장의 초청으로 전격 성사됐다. 손정의 일본 소프트뱅크그룹 회장이 한국을 찾았을 때도 주요 그룹 회장들은 만찬을 겸한 회동을 했다.2018년 문재인 대통령의 방북 당시 동행한 재계 총수들은 백두산 천지를 배경으로 서로 사진을 찍어주는 등 화기애애한 모습을 보였다.주요 그룹들의 협업은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과 교수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기업들이 서로 협력하기 시작했고, 최근 그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졌다”며 “함께 산업 생태계를 만들어야 시장을 주도할 수 있기 때문에 협업 사례가 더욱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김보형/최만수/도병욱/이수빈 기자 kph21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