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가 등극하면 나머지 왕자들은 죽어야 했던 나라

오가사와라 히로유키가 쓴 오스만 제국 통사 번역 출간

부황 무라드 3세의 죽음으로 28세에 등극한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드 3세(재위 1595~1603). 즉위 직후 이스탄불의 궁전에서 어린 동생 19명으로부터 축하를 받았으나 슬픔으로 얼굴을 돌려야 했다. 그들의 운명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제(술탄)가 바뀌면 새 황제의 형제들을 처형한다는 것은 오스만 제국 건국 이래의 관습이었고 15세기 말에는 아예 법령에 그 근거가 명시됐다.

그렇다 하더라도 아무 죄도 없는 어린 왕자 19명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은 일은 온 나라를 비탄에 빠트렸고 이는 결국 '형제 살해'라는 악습이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철폐되는 계기가 됐다.
오스만 제국과 터키 공화국 역사 전문가인 오가사와라 히로유키(小笠原弘幸) 일본 규슈대 대학원 교수의 '오스만 제국: 찬란한 600년의 기록'(까치글방)은 오스만 제국의 총체적인 역사를 학술적으로 다룬 책으로는 일본에서 50여 년 만에 처음 출간됐다.

유라시아와 아프리카에 걸쳐 광대한 제국을 건설한 오스만이 세계사에서 차지한 비중을 생각하면 이 나라의 통사를 엮은 책이 우리나라는 물론 학문 선진국에서도 많지 않은 것은 조금은 뜻밖이다.

이 대제국의 역사를 오늘날이 아닌 그 시대의 논리와 관점에서 풀어나간 점이 눈에 띈다. '형제 살해'를 보는 방식이 대표적이다.

현재의 시각으로 보면 잔인하고 반문명적인 관습이지만 그 시대에는 나름대로 존재 이유가 있었으니, 권력의 안정이 그것이다.

튀르크계나 몽골계 왕조는 카리스마 강한 지도자가 살아 있는 동안은 강력한 결속력을 발휘해 급속히 확대됐다가, 그 지도자가 죽은 후에는 후계자 다툼으로 분열한 끝에 급작스럽게 붕괴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나마 오래 존속했다는 티무르 왕조가 겨우 130년간 유지된 데 비해 튀르크계가 세운 나라이면서도 오스만이 600년 동안이나 단일 왕조를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군주와 같은 세대의 남자 왕족의 수를 '형제 살해'로 최소화해 제위 다툼을 방지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풀이한다.

역사적 자료는 거의 남지 않았지만, 왕조 개창기였던 14세기 초부터 이미 제위 계승을 위협할 수 있는 남자 왕족을 죽이거나 눈을 멀게 하는 일은 흔했던 것으로 보인다.

부황의 생전에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가 폐위된 뒤 재차 즉위한 메흐메드 2세(1444~1446, 1451~1481)는 1451년 두 번째로 즉위하자마자 동생 아흐메드부터 처형했다.

메흐메드 2세의 만년에 편찬된 법령집에는 '세상의 질서를 위해서 형제를 처형할 수 있다'고 명문화했다.

이때부터는 왕자가 단 한명일 때와 같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황제가 세상을 떠난 경우에는 대개 지방에 태수로 나가 있던 왕자 가운데 한 명이 군사를 이끌고 수도로 입성해 정권을 장악하고 나머지 형제들을 처형하는 것이 관행으로 굳어졌다.

그러나 1603년 메흐메드 3세가 죽고 아흐메드 1세(1603~1617)가 즉위했을 때 그의 동생 무스타파는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다.

메흐메드 3세의 등극과 함께 19명이나 되는 왕자들이 목숨을 잃은 것에 대해 온 나라가 큰 충격에 빠졌던 것이 이에 영향을 미쳤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이때부터 새 황제의 형제는 목숨은 유지하지만 궁전의 한구석 '새장(Kafes)'에 격리되는 관습이 생겼다.

'새장'에 갇힌 왕자는 황제의 결정에 따라 꽤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도 있었지만, 제위 계승권자가 늘어나는 것을 막는 차원에서 아들을 낳을 수는 없었다.

물론 '형제 살해' 관행이 폐지된 후에도 왕자들 간 계승 다툼에서 서로 죽이는 일은 그치지 않았다.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거나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는 경우, 심지어 모후가 다른 모후를 죽이는 등 궁정 내 피비린내는 끊이지 않았다.

또 어린 나이에 보위를 물려받은 황제를 잘 보좌해 권력을 안정시키고 수십 년간 충성을 다한 대재상을 어느 날 갑자기 처형하거나 암살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비슷한 시기에 존속했던 조선 왕조에서도 골육상쟁이 종종 일어났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오스만 제국의 지배자는 궁중 내 하렘에 수많은 궁녀를 두고 음란한 생활에 탐닉하는 것으로 영화 등에서 흔히 묘사되지만, 실제로 오스만 황제의 성생활과 하렘 후궁들의 출산에서도 최우선 고려 요소는 왕조의 안정이었다.

오스만 제국에서 왕자의 어머니가 어떤 신분인지는 왕자의 제위 계승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오히려 외척에 의해 국정이 좌우될 가능성을 줄여준다는 점에서 노예 출신 후궁의 소산이 계승자로 선호됐다.

이슬람법상 무슬림은 노예가 될 수 없었으므로 노예란 기독교도 등 이교도임을 의미했다.

이슬람의 맹주 칼리프를 겸했던 오스만 제국의 술탄 가운데 대부분의 몸에는 이교도의 피가 흐르고 있었던 셈이다.

물론 피 흘리는 제위 다툼만이 오스만 제국 역사의 전부는 아니다.

이 책은 14세기 초 아나톨리아에 난립하던 많은 튀르크계 후국(侯國)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던 오스만이 점점 힘을 키워 아나톨리아를 통일한 데 이어 유럽으로 진군해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키고 현재의 보스니아에서 이란 동부, 북아프리카에서 우크라이나에 이르는 고대 로마 제국 이후 최대의 지중해 국가로 부상하는 과정을 살핀다.

전성기 때의 오스만 제국은 유럽 강국들을 벌벌 떨게 할 정도였다.

비잔틴 제국을 정복한 메흐메드 2세는 새 수도 이스탄불의 궁전 정문에 자신을 '두 대륙의 하칸, 두 바다의 술탄'이라고 칭하는 글을 새겨넣었다.

'하칸'은 튀르크-몽골계 군주인 '칸'과 같은 말이다.

유럽과 아시아, 지중해와 흑해의 지배자로서 자부심을 드러낸 문구다.

전성기의 오스만 제국 지배자들은 자신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나 로마 제국 황제와 같은 반열로 생각했으며 유럽의 군주들을 결코 동급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책은 또 18세기 이후 유럽 기독교 국가들로 이뤄진 신성동맹, 러시아, 영국, 프랑스 등과 벌인 전쟁에서 잇따라 패배해 정복한 영토를 빼앗기고 근대 국가로 거듭나기 위한 개혁에 성과를 거두지 못한 가운데 제1차 세계대전 패전의 멍에를 쓴 오스만 왕조가 시대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여정을 쫓아간다.

오스만 제국에서도 저자가 영국의 '마그나 카르타'나 '명예혁명'에 비견할 만하다고 말한 개혁 움직임이 있었고 유대인의 법적 평등을 인정하는 데는 오스트리아보다, 헌법을 제정하는 데는 러시아보다 더 앞섰다.

그러나 일찌감치 근대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대외 팽창에 나선 영국, 프랑스, 독일과 같은 유럽 강국들의 공세와 제국 영역 내에서 들불처럼 일어난 민족 독립의 기세에 맞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터키 공화국의 수립으로 종말을 맞기는 했으나 오스만 제국의 존속 기간은 세계사를 통틀어서도 드물게 길다.

저자는 오스만 제국의 오랜 존속을 가능케 한 것은 탁월한 제위 계승 체제와 유연한 권력 구조라고 본다.

또한 황제를 비롯한 제국인들의 다층적이고 다양한 소속 의식도 거기에 한몫했다고 설명한다.

근대 이전의 오스만 사회는 이런 동상이몽 속에서 느슨한 통합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근대 이전 제국의 특징이었던 유연한 구조는 균일하고도 동질적인 국민국가를 형성하는 세계적인 흐름을 만나자 기능부전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저자는 한 연구자의 말을 빌려 "만약 오스만 제국이 아메리카 대륙처럼 상대적으로 고립된 지역에 위치해 열강의 간섭을 받지 않았다면 무슬림과 비무슬림의 차별이 미국의 공민권 운동 같은 형태로 서서히 진행됐을 것"이라고 진단한다. 노경아 옮김. 344쪽. 1만6천원.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