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한 잔의 위로…편의점 커피 '디자인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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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필 기자의 슬기로운 커피생활지난 2월부터 세븐일레븐에서 독점 판매하고 있는 빙그레 커피음료 아카페라의 ‘감성 아메리카노’(사진). 이 제품 페트병 겉면에는 문학 작품, 정확하게는 시(詩) 한 구절이 실려 있다. 이제니 시인이 창비를 통해 2010년 출간한 시집 《아마도 아프리카》에 수록된 시 ‘밤의 공벌레’의 일부다.
‘온 힘을 다해 살아내지 않기로 했다/꽃이 지는 것을 보고 알았다//기절하지 않으려고 눈동자를 깜빡였다/한 번으로 부족해 두 번 깜빡였다//너는 긴 인생을 틀린 맞춤법으로 살았고/그건 너의 잘못이 아니었다//이 삶이 시계라면/나는 바늘을 부러뜨릴 테다.’감성 아메리카노는 출시 때부터 이런 디자인을 선보이는 데 편의점과 출판사, 커피 제조사가 협업한 사례로 주목받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사연은 이렇다. 세븐일레븐은 편의점 커피의 제품 디자인을 남들과 다르게 해보자고 했다. ‘서울 광화문 교보생명 빌딩 외벽 광화문글판 앞에 사람들이 발길을 잠시 멈추는 것처럼, 삶에 위로가 되는 글을 커피 제품 겉면에 새기면 어떨까’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출판사 창비다. 창비는 54년 역사를 지닌 문학 전문 출판사. 1년에 네 번 계간지 《창작과 비평》을 출간하며 한국 현대문학사를 이끌어왔다. 창비는 문학 작품의 대중화를 시도하던 차였다. 세븐일레븐의 제안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창비는 위로의 한마디를 건넬 수 있는 문학 작품을 엄선해 내줬다.
시의 긴 글귀를 다 담기엔 대용량 페트병 음료가 적당했다. 세븐일레븐은 ‘아카페라’를 앞세워 페트병 커피 시장을 선도하고 있는 빙그레에 협업을 제안했다. 이렇게 출판사, 편의점, 식품 제조사 등 3자가 머리를 맞대 ‘감성음료’ 시리즈가 탄생했다. 세븐일레븐은 함께 출시한 ‘감성음료 밀크티’에는 황정은 작가의 대산문학상 소설부문 수상작 《계속해보겠습니다》의 글귀를 실었다. 감성음료 시리즈 제품은 월평균 5000만원어치씩 꾸준히 팔리는 베스트셀러 제품이 됐다.
벤치마킹 사례가 이어졌다. 편의점 CU는 국내 신진 작가들과 손잡았다. 미술 전시회가 대폭 축소돼 어려움을 겪고 있는 청년 작가를 돕기 위해 이들을 지원하는 사회적 기업 88후드와 손잡고 22명 작가의 작품을 파우치 커피와 음료 ‘델라페 아이스드링크’에 넣었다.배달 앱 배달의민족과 협업한 커피 제품도 나왔다. 배민은 ‘B급 감성’을 내세워 재미있는 문구를 만들기로 유명하다. 배민이 편의점용 컵커피에 써놓은 문구는 ‘주문하신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였다. ‘배달’과 ‘커피’라는 키워드를 담은 문구다. 편의점으로 간 커피는 이제 시인과 작가들의 원고지로, 예술가들의 캔버스로, 카피라이터의 연습장으로 거듭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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