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부품·장비 국산화, 아직은 '절반의 성공'

일본 수출규제 1년

일본의 수출 규제 조치 이후
100가지 핵심품목 국산화 추진
불화수소 등 의존도 낮췄지만
핵심 경쟁력에선 아직도 밀려
글로벌 분업 체제로 발전한
한·일 양국 기업 모두가 피해
문재인 대통령(맨 오른쪽)이 일본의 한국 수출 규제가 본격화한 지난해 8월 경기 김포에 있는 로봇 감속기 등 부품 제조업체 에스비비테크를 방문해 장비를 살펴보고 있다. 한국은 일본의 수출규제에 맞서 소재·부품·장비의 국산화를 적극 추진하고 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는 평가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일본 수출 규제 1년을 맞아 ‘소부장(소재·부품·장비의 줄임말)’이라는 단어가 뉴스에 자주 등장한다. 소부장은 쉽게 말해 산업의 ‘기초 체력’이다. 소재는 반도체나 TV, 자동차 등을 생산할 때 필요한 재료를 말한다. 장비는 각종 제품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기계이고, 부품은 제품이나 장비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부속품을 일컫는다.

질 좋은 재료를 제대로 만들 수 없거나 외부에서 사올 수 없다면 반도체 같은 제품을 생산해 파는 데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신선하고 좋은 식재료 없이는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일본 수출 규제는 이처럼 질 좋은 재료들을 필요할 때마다 손쉽게 사다 쓰는 구조에 문제가 생겼다는 걸 의미했다. 작년 7월 일본 수출 규제 이후 1년 동안 상황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소부장’ 국산화 성과는

일본 수출 규제를 계기로 한국 정부는 ‘소부장 국산화’를 추진하는 중이다. 즉, 일본으로부터 품질 좋은 재료를 사오기 어렵다면 우리가 재료부터 완성품까지 직접 만들어 쓰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는 것이다.

정부는 일본 수출 규제 이후 100가지 소재·부품·장비를 핵심 품목으로 지정하고 국산화를 집중 추진해왔다. 국내 기업들이 각종 연구를 통해 100가지 품목을 직접 생산할 수 있도록 예산, 컨설팅 등을 지원했다. 정부는 조만간 ‘소부장 2.0 전략’을 내놓고 이 핵심 품목을 338개로 3배 이상 확대할 계획이다.

좋은 소부장을 수입할 수 없다면 직접 만들어서라도 쓰려는 이유는 한국 경제에서 반도체, 자동차 등 제조업이 차지하는 역할이 크기 때문이다. 작년 한국 전체 수출액의 17.3%는 반도체 수출이 담당했다.이런 국산화 노력의 성과는 일본 수출 규제 이후 1년이 지나면서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 일본이 작년 7월 초부터 수출 규제를 대폭 강화한 세 가지 품목은 반도체를 만들 때 쓰이는 고순도 불화수소와 포토레지스트, 그리고 스마트폰 액정과 같은 디스플레이를 만들 때 필요한 플루오린폴리이미드다. 많게는 90%를 일본산에 의존하고 있는 품목들이었다.

1년간 한국 산업계와 정부의 각종 노력으로 일본 수출 규제 이전보다 일본산 의존도가 낮아진 건 사실이다. 특히 고순도 불화수소의 경우 액체는 국산화에 성공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액체 불화수소는 반도체의 불순물을 씻어낼 때 사용하는 소재다. 일본의 수출 규제 이전에는 일본 스텔라케미파, 모리타화학 등이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에 수출했다. 규제 이후 국산화를 위한 노력이 이어졌고 올초 국내 솔브레인, 램테크놀러지 등이 일본산을 대신할 만한 제품을 양산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나머지 두 품목은 수입액 중 일본산이 차지하는 비중이 여전히 70~80%대다. 한국 기업들은 현재도 일본으로부터 많은 재료와 부품, 장비를 수입해오고 있다. 일본이 아니더라도 유럽 등 다른 나라에서 대신 수입해오는 경우도 있다. 국내에서 단기간에 질 좋은 소재나 부품, 장비를 만들어낼 수 없어서다.소재와 부품, 장비는 아주 작은 차이로도 품질이 현저하게 차이가 난다. 20~30년 전부터 노하우를 쌓아온 선진국 업체들을 1년 만에 따라잡기는 힘들다. 작년 7월 일본 수출 규제 소식에 국내 산업계와 정부가 놀란 까닭은 소재가 각종 산업에 중요할 뿐 아니라 특히 일본산 소재가 품질이 좋아 단기간에 다른 제품으로 교체하는 게 어렵기 때문이었다.

한·일 갈등은 양측에 손해

산업계와 학계에선 한·일이 갈등을 지속하는 건 양측 모두에 손해라고 본다. 한국 입장에선 첨단산업에서 모든 공정에 들어가는 재료와 장비를 국산화하는 것은 불가능할뿐더러 비효율적이다. 품질 좋은 재료를 써야 최종 상품의 질도 높아지는데, 일본 제품이라고 무조건 배제하는 것은 제품의 질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산 소재를 대체하기 어려운 품목이 200여 종에 달한다는 분석도 있다.

일본 기업들 역시 한·일 갈등으로 불이익을 당하기는 마찬가지다. 글로벌 반도체 기업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있는 한국에 재료를 팔지 못하면 일본 기업의 손해가 크다.한·일 양국은 오랫동안 무역을 통해 여러 산업 분야에서 분업 체제를 이루며 함께 성장해왔다. 전문가들은 한·일 산업 강화를 위해서는 양국 협력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한다. 이홍배 동의대 무역학과 교수는 지난 6월 29일 전국경제인연합회가 개최한 ‘일본 수출규제 1년, 평가와 과제’ 세미나에서 “한·일 산업이 경쟁우위를 확보하려면 역설적으로 일본과의 긴밀한 협력은 필수”라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한·일 소재·부품·장비산업은 분업체제를 통해 2018년 기준 약 811억달러 규모의 부가가치를 창출했다”며 “전체 제조업으로 확대하면 부가가치가 1233억달러(약 136조원)로 늘어난다”고 분석했다. 거꾸로 말하면 두 나라가 분업 체제를 적절히 활용하지 못할 경우 이만큼의 이익을 잃는다는 의미다.

구은서 한국경제신문 경제부 기자 koo@hankyung.com

NIE 포인트

1. 한국과 중국이 상대적으로 낮은 임금을 바탕으로 완성품 조립·생산에 주력하고 일본이 고도의 기술을 요구하는 소재·부품·장비 개발·생산에 집중하는 동북아시아 분업구조는 앞으로도 계속 확대될까.2. 소재·부품·장비의 국산화 혹은 수입국가 다변화, 일본여행 자제와 일본제품 불매운동 등 이외에 일본의 수출규제에 대응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3. 한일갈등뿐 아니라 코로나19 사태에 따른 글로벌 공급망 붕괴와 국제적 이동제한, 자국우선주의 강화 등 국제여건이 계속 악화되고 있는데 수출주도 경제인 한국이 지속성장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