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변호사→시민운동가→행정가…급작스럽게 끝맺은 박원순의 '족적' [라이브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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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변호사로 조영래와 맹활약고(故) 박원순 서울시장이 지난 10일 숨진 채 발견됐다.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의혹에 휘말려 극단적 선택을 한 것 아니냐는 해석도 나오지만 인권변호사·시민운동가·행정가로 살아온 박원순 시장의 65년은 늘 '성과'로 가득했다.
진보적 시민단체 단체 이끌며 기틀 마련
행정가로 변신해 최초의 3선 시장
검사복 벗고 인권변호사로 맹활약한 박원순
1955년 경남 창녕의 한 농가에서 7남매 중 여섯째 아들로 태어난 박원순 시장은 1974년 경기고를 졸업한 뒤 1975년 서울대 사회계열에 입학했다. 그러나 유신 반대 시위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투옥돼 옥살이한 뒤 제적됐다. 이후 단국대 사학과에 입학했다.입학하자마자 사법시험을 준비한 박원순 시장은 1980년 고시에 합격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사법연수원 동기로도 알려져 있다. 대구지검에서 검사로 재직했으나 '사람 잡아넣는 일'이 체질에 맞지 않았던 그는 검사복을 벗어 던지고 인권변호사의 길을 택한다.
1983년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한 박원순 시장은 또다른 사법연수원 동기였던 고(故) 조영래 변호사와 함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등 시국사건들 변론을 맡으며 인권변호사로서의 족적을 남기기 시작한다.그는 권인숙 성고문 사건과 미국 문화원 사건, 서울대 우 조교 성희롱 사건 등 민감한 사건을 주로 맡으며 사회적 약자를 돕기 위한 삶을 살아왔다. 특히 박원순 시장이 서울대 우 조교 사건을 통해 성희롱이 법적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린 만큼 이번 극단적 선택은 진한 아쉬움을 남겼다.
우 조교 성희롱 사건은 1993년 법적으로 최초 제기된 성희롱 사건이다. 이종걸·최은순 변호사와 함께 피해자를 대리한 박원순 시장은 6년간의 법정 공방 끝에 1998년 서울고등법원에서 가해자가 우 조교의 정신적 피해에 500만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이끌어냈다.
당시 박원순 시장이 고소장에 적은 마지막 문장은 깊은 여운을 남겼다. "호숫가에서 아이들이 장난삼아 던진 돌멩이로 개구리를 맞춘다. 아이들은 장난이지만 개구리는 치명적 피해를 입는다"는 내용이었다. 박 시장은 같은해 이 사건의 변호인 자격으로 받은 '올해의 여성운동상' 상금을 한국여성단체연합에 기부하기도 했다.
진보적 시민운동계의 기둥으로 자리 잡은 박원순
박원순 시장은 1994년 국내의 대표적인 시민단체인 '참여연대' 설립을 주도해 2002년까지 참여연대 사무처장으로 일하면서 한국 시민운동의 밭을 갈았다. △소액주주 권리찾기운동 △국회의원 낙선운동 △1인 시위 등을 벌이며 정치권과 사회에 새로운 개혁 방안을 제시했다.재벌개혁을 하겠다며 나선 소액주주 운동은 정치권과 경제계에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박원순 시장은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과 당시 소액주주 운동을 이끌었다.1997년 3월7일 제일은행 주주총회장. 장하성 주중대사(당시 참여연대 경제민주화위원장)를 비롯한 참여연대 전문가와 간사 12명이 등장했다. 이들은 두 달 전 부도를 낸 재벌순위 14위 한보그룹에 대규모 불법 대출을 해줘 부실화된 제일은행에 책임을 묻기 위해 명동 증권가에서 캠페인을 벌이며 소액주주 20명으로부터 14만1471주에 대한 주주 권리를 위임받았다.
같은해 3월27일 오전 9시 열린 주주총회에서는 전환사채 발행의 부당성 등을 놓고 참여연대와 경영진 간 공방이 13시간30분간 이어지기도 했다. 이날 주주총회는 소액주주 참여가 기업경영을 바꿀 수 있다는 기대를 확산시키는 전환점이 됐다.
참여연대 활동을 통해 시민운동을 정착시킨 박원순 시장은 2000년부터 '기부·나눔·참여'에 관심을 두며 또 한 번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2000년 아름다운 재단을 설립, 이를 토대로 사회적 기업인 아름다운 가게도 열었다.
2006년부터는 희망제작소 상임이사로 재직했다. 희망제작소는 공공기관에 시민을 위한 정책을 제안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민관 협치 기관으로 평가받고 있다. 박원순 시장이 뿌리를 내린 이들 단체는 이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시민단체가 됐다.
행정가로 변신한 박원순…역사상 첫 민선 3선 서울시장
박원순 시장은 2011년 오세훈 전 시장 사퇴로 공석이 된 서울시장 후보로 급부상한다. 시민운동가 출신으로 대중 정치에 도전장을 낸 것이다. 당시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던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의 양보로 단일화되면서 박원순 시장은 당선에 성공했다.서울시장이 된 박원순 시장은 '반값등록금' '무상급식' '비정규직 정규직화' '도시재생' 등 자신이 꿈꿨던 사회혁신 정책을 하나 둘 실행에 옮겼다. 이후 2017년 19대 대선에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 나섰다 중도 포기했으나, 서울시 최초로 민선 3선 시장 고지에 오르면서 여권의 유력 대선주자로 부상했다.
박원순 시장은 3선에 성공한 이후 '서울 10년 혁명 완수' 기치를 내걸고 '시민과의 협치', '경제', '평화와 안보' 등의 정책 비전을 내놓았다. '박원순표 시민 협치'를 통해 서울시의 위원회 숫자는 2011년 103개에서 2017년 7월 기준 189개로 큰 폭으로 늘었다.
서울·평양 간 적극적 도시교류 추진 등 통일 시대를 준비하는 행정가로서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최근에는 '서울 10년 혁명'을 끝까지 완수하겠다는 포부를 밝히며 '강남·강북 균형발전' 비전을 새로 제시했다. 강남과 강북이 격차를 없애 서울이 고르게 잘 사는 사회를 만들고 시민들이 체감하는 삶의 변화를 이뤄내 시민들의 지지를 받아 더 큰 꿈을 꾸겠다는 목표도 있었다.
이른바 '서울시 10년 혁명' 완성을 1년 2개월, 대선을 1년 6개월 남짓 남겨뒀던 박원순 시장은 2020년 7월 세상을 떠났다.
수많은 족적 끝에 사라지지 않을 논란 남긴 박원순
이처럼 박원순 시장의 삶은 도전의 연속이었다. 큰 성과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 같은 공을 쌓은 그의 죽음을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의혹 때문이다.박원순 시장은 앞서 언급됐던 서울대 우 조교 성희롱 사건을 세상에 알린 만큼 시민운동계에서도 높은 젠더의식을 가진 인물이란 평가를 받아왔다. 박원순 시장 스스로 서울시정을 맡아 각종 성 평등 정책에 힘을 싣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2012년 '여성의 날'을 맞아 '여성의 삶을 바꾸는 서울 비전'을 발표하고 "서울 여성들이 꽃보다도 더 아름다운 인권을 즐길 수 있는 그런 시대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말했다. 지난해 1월에는 성 평등 문제 등에 관해 시장을 보좌하는 특별 직위로 '젠더 특보'를 시장실 직속으로 신설하기도 했다.그래서 더욱 충격을 던진 박원순 시장의 죽음을 둘러싸고 어떤 방식으로 추모할지 의견이 분분한 상황이 됐다. 류호정 정의당 의원은 박원순 시장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피해자를 옹호하며 "박원순 시장 빈소에 조문하러 가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조준혁 한경닷컴 기자 pressch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