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입성 때가 내 생애 최고의 날"…6·25영웅의 퇴장

백선엽 장군 타계…향년 100세

32세에 한국 최초 대장 승진
사단장때 권총 들고 맨 앞서 진격
낙동강 지켜낸 '전쟁 영웅'
숙청 대상 박정희 구해내기도
백선엽 장군이 2013년 8월 경기 파주시 뉴멕시코 사격장에서 열린 미8군 명예사령관 임명식에서 미군 야전상의를 입은 채 경례하고 있다. 연합뉴스
‘6·25전쟁 영웅’ 백선엽 장군이 지난 10일 오후 11시께 별세했다. 향년 100세.

백 장군은 1920년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태어났다. 1941년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일제 치하 만주군 장교로 복무하던 그는 해방 이후 평양에서 생활하다 1945년 12월 월남했다. 1946년에는 국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에 입대, 부산 제5연대 중대장을 맡아 한국군 창군 원년 멤버가 됐다.백 장군은 한국 최초의 4성 장군으로 유명하다. 1953년 1월 그가 32세라는 나이에 대장 계급장을 달 수 있었던 이유는 6·25전쟁에서 주요한 전투마다 혁혁한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1950년 8월 다부동 전투는 백 장군이 활약한 대표적인 전투 중 하나다. 대구 북방 25㎞ 지역의 다부동은 대구 방어를 위해 반드시 지켜내야 할 전술적 요충지였다. 백 장군은 국군이 밀리는 모습을 보이자 권총을 꺼내들고 적진으로 돌격했다. 그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앞장설 테니 내가 두려움에 밀려 후퇴하면 너희가 나를 쏴라.” 그는 그렇게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냈다.

인천상륙작전 성공 이후 백 장군이 1사단을 이끌고 미군보다 앞서 평양을 함락한 일화도 유명하다. 당시만 해도 미군 지휘관들이 한국군의 전투력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던 때였다. 백 장군은 “1사단의 전투력과 사기가 매우 높아 제일 빨리 전진할 수 있다”며 “어렸을 적 평양에 살아 길을 잘 안다”고 영어로 미군을 설득했다고 한다. 이때 백 장군은 미군을 요청해 대대급 전차 부대 지원까지 받아냈다. 미군 부대가 타국 지휘관의 지휘를 받은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을 제외하면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그가 이끄는 1사단은 1950년 10월 19일 평양을 점령했다. 백 장군은 생전 언론 인터뷰에서 “1사단장으로 한·미 장병 1만5000여 명을 지휘하며 고향(평남 강서)을 탈환했다”며 “평양에 입성했을 때가 내 생애 최고의 날이었다. 평생 잊을 수 없다”고 회고한 바 있다.백 장군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 인연이 깊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1948년 정부 수립 직후 남로당 숙청 분위기 속에서 남로당 활동을 하던 박 전 대통령은 여수·순천 사건에 연루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장으로 재직 중이던 백 장군은 만주 시절 동료 20명과 함께 ‘박정희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는 보증서까지 써서 박 전 대통령이 풀려나는 데 일조했다. 1953년 박 전 대통령의 장군 진급 때도 남로당 전력을 문제삼는 일각의 반대를 무릅쓰고 인사를 강행했다.

1960년 5·16군사정변 직후 중화민국(대만) 주재 대사로 부임한 백 장군은 이후 주프랑스 대사, 주캐나다 대사 등을 지냈다. 1969년 12월에는 교통부 장관으로 임명돼 서울지하철 1호선 건설을 주도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30호실에 마련됐다. 발인은 15일 오전 7시다. 같은 날 대전현충원에 안장될 예정이다.

임락근 기자 rkl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