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최저임금 초점은 기업 살리기…노동자는 소득보단 고용유지

코로나19 사태에 중기-자영업자 부담완화 우선…경영계 손들어줘
최저임금 산입범위 확대 등 고려하면 사실상 동결·삭감 우려도
최저임금 1만원 내건 문재인 정부 역대 최저 인상률 기록 '아이러니'
내년도 최저임금이 올해(8천590원)보다 130원(1.5%) 오른 8천720원으로 14일 결정됐다.국내 최저임금제도를 처음 시행한 1988년 이후 가장 낮은 인상률이다.

'최저임금 1만원' 공약을 내걸고 집권 초기 최저임금 인상 드라이브를 걸었던 문재인 정부가 역설적이게도 가장 낮은 최저임금 인상률 기록을 남기게 됐다.

무엇보다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에 따른 경제 위기가 초래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코로나19 사태 속 경영계 주장 통해
내년도 최저임금 심의는 처음부터 코로나19 사태가 결정적인 변수로 작용했다.

박준식 최저임금위원장은 내년도 최저임금 심의를 시작한 지난달 11일 1차 전원회의에서 코로나19 사태를 '전무후무한 상황'으로 규정하며 최저임금 심의도 그만큼 큰 의미를 띠게 됐다고 강조했다.

경영계는 코로나19 사태로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이 한계 상황에 도달했다며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인건비 부담을 더는 버틸 수 없다고 주장했다.올해 적용 중인 최저임금 인상률(2.9%)은 역대 세 번째로 낮은 수준이지만, 문재인 정부 초기인 2018년과 2019년 최저임금이 각각 16.4%, 10.9% 올라 이미 과도하게 높은 수준이라는 게 경영계의 입장이다.

2018년부터 올해까지 3년 동안 최저임금 인상률은 32.8%에 달한다.

경영계는 국제통화기금(IMF)이 올해 한국의 경제성장률을 -2.1%로 예상한 점 등을 거론하며 '마이너스' 성장이 현실화할 가능성도 제기했다.이를 토대로 내년도 최저임금의 삭감을 줄기차게 요구했다.

노동계도 코로나19 사태를 핵심 변수로 고려했지만, 결론은 정반대였다.

코로나19 사태로 저임금 노동자의 생계가 어려워진 만큼, 사회 안전망인 최저임금 인상의 필요성이 더 커졌다고 노동계는 주장했다.

최저임금 인상으로 소비가 활성화하면 경제 회복도 탄력을 받을 수 있다는 게 노동계의 입장이다.

소득주도성장과 같은 맥락의 주장으로 볼 수 있다.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의 어려움도 최저임금 인상이 아니라 재벌 대기업 중심의 경제 구조에 따른 것이라고 노동계는 지적했다.

대·중소기업의 불공정거래 완화로 해결해야지, 최저임금 인상 억제로 접근할 문제는 아니라는 주장이다.

이런 상황에서 내년도 최저임금 인상률이 역대 최저 수준으로 정해진 것은 결국 경영계의 주장이 힘을 얻은 결과로 볼 수 있다.
◇ 저임금 노동자 고용 유지도 고려한 듯
내년도 최저임금 인상률이 역대 최저 수준으로 결정된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대목인 게 사실이다.

내년도 최저임금을 제외하면 지금까지 역대 최저 수준의 인상률을 기록한 것은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때인 1998년(2.7%)이다.

IMF 외환위기 당시 고용 충격은 코로나19 사태의 충격보다 훨씬 심했던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분석 결과에 따르면 코로나19 사태 첫 3개월인 올해 3∼5월 국내 취업자 감소 폭은 87만명으로, IMF 외환위기 첫 3개월인 1998년 1∼3월의 103만명에는 못 미친다.

그러나 IMF 외환위기 때는 대기업 중심의 구조조정으로 정규직 노동자가 대량 해고로 내몰렸지만, 코로나19 사태의 고용 충격은 비정규직, 임시·일용직, 특수고용직 등 취약계층에 집중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최저임금의 영향을 주로 받는 사람도 이들이다.

내년도 최저임금 심의를 주도한 공익위원들도 이 부분에 주목한 것으로 보인다.

2018년 고용 지표의 악화가 최저임금 인상 탓이라는 주장은 정치적 의도에 따라 부풀려진 면이 있지만, 최저임금 인상이 저임금 노동자를 고용한 영세 사업장의 감원 압박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에는 전문가들이 대체로 동의한다.

코로나19 사태를 맞아 저임금 노동자의 고용 유지를 우선 목표로 삼는다면 최저임금 인상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는 얘기다.

공익위원 간사인 권순원 숙명여대 교수는 "불확실한 상황에서 기업들이 가장 먼저 조정하는 비용이 노동력인데 최저임금이 기대 이상으로 올랐을 경우 초래될 수 있는 노동시장의 일자리 감축 효과, 그것이 노동자 생계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이 훨씬 크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최저임금을 받는 저임금 노동자의 생계를 외면했다는 지적은 피할 수 없을 전망이다.

최저임금의 영향을 받는 노동자는 수백만 명에 달한다.

특히, 최저임금 산입범위가 내년에도 확대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사실상 동결 혹은 삭감과 같은 결과가 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최저임금 산입 범위가 확대되면 사용자는 실제 임금을 그만큼 덜 올려주고도 최저임금 위반을 면할 수 있게 된다.

2018년 최저임금법 개정으로 최저임금 산입 범위에 들어가는 정기 상여금과 복리후생비는 단계적으로 확대돼 2024년에는 전액이 산입 범위에 포함된다.
◇ '최저임금 1만원' 공약 결국 좌초될 듯
내년도 최저임금 인상률이 1.5%에 그침에 따라 문재인 정부의 최저임금 1만원 공약은 실현 가능성에서 한층 멀어지게 됐다.

당초 현 정부의 공약은 최저임금을 올해까지 1만원으로 올린다는 것이었다.

이는 올해 적용할 최저임금을 의결한 지난해 심의에서 이미 물거품이 됐다.

현 정부 임기 마지막 해인 2022년까지 최저임금 1만원 공약이 실현될 가능성도 크지 않다.

내년도 최저임금이 8천720원으로 정해진 상황에서 2022년 최저임금 1만원을 실현하려면 내년 심의에서 인상률이 14.7%가 돼야 한다.

코로나19 사태가 앞으로 최소 1∼2년 동안 계속될 것이라는 전망을 고려하면 내년 심의에서도 높은 인상률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결국, 최저임금 1만원의 실현은 다음 정부의 과제로 넘어갈 공산이 커졌다.

현 정부가 출범과 함께 내건 최저임금 1만원 실현 공약은 2018년 고용 지표 악화가 최저임금 인상 탓이라는 여론에 밀린 데 이어 코로나19 사태라는 예기치 못한 국가적 위기를 맞아 좌초될 것으로 보인다.

이는 결국 현 정부가 일관된 철학과 전략으로 노동 정책을 추진하지 못한 탓이라는 게 노동계의 시각이다.

최저임금 인상도 경제 민주화의 큰 틀에서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를 위한 정책과 맞물리도록 해야 했지만, 최저임금 인상만 밀어붙여 저임금 노동자와 자영업자의 '을과 을'의 갈등 구도가 만들어졌고 결국 여기에 발목이 잡혔다는 것이다.이주호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정책실장은 "최저임금 인상을 포함한 현 정부의 각종 노동존중사회 정책은 '촛불 혁명'의 분위기 속에서 탄생했지만, 철학과 전략의 뒷받침이 없어 대체로 '용두사미'가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