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호소인'인가 '피해자'인가…박원순 고소인 지칭 논란(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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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담배성폭력' 사건 때 학생들이 '피해호소인', '가해지목인' 용어 사용
일각에선 "'피해자'가 맞다…책임 덜기 위해 '피해호소인' 써선 안 돼" 지적도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사망 후 장례나 조문 등을 놓고 논란이 벌어진 가운데 최근 며칠 사이에는 '피해호소인'과 '피해자'라는 용어 선택을 두고도 새로운 대립구도가 만들어지고 있다. 박 전 시장이 몸담았던 더불어민주당과 서울시는 이번 사건에서 '피해호소인'이라는 표현을 고수하고 있지만, 여성단체들은 '피해자'가 더 적절한 표현이라고 반박한다. ◇ 박 전 시장 고소인 호칭은 '피해호소인'? '피해자'?
이해찬 민주당 대표는 15일 박 전 시장과 오거돈 전 부산시장 문제와 관련 "피해호소인이 겪는 고통에 깊은 위로의 말씀을 드리며 이런 상황에 대해 민주당 대표로 다시 한번 통절한 사과를 말씀드린다"고 말했다.
서울시는 같은 날 입장 발표 때 '피해호소 직원'이라는 말을 썼다. 서울시는 이에 대해 피해 사실이 내부에 접수되고 조사 등이 진행돼야 '피해자'라는 말을 쓴다고 했다.
그러나 지난 4월 시장 비서실 남자 직원의 성폭행 사건 당시에는 고소한 직원을 '피해자'로 지칭한 바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박 전 시장의 장례위원회와 심상정 정의당 대표, 한국여기자회 등도 이번 사건과 관련한 입장을 밝히며 고소인을 '피해호소인'이라고 불렀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나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서도 여권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고소인 측에서 내놓은 증거로는 피해를 확정하기가 어렵다"는 이유 등으로 '피해호소인'을 고수하는 현상이 눈에 띈다.
반면 여성단체들은 대체로 '피해자'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박 전 시장을 성추행 등으로 고소한 전직 비서 A씨를 대리하는 한국성폭력상담소와 한국여성의전화는 13일 기자회견에서 A씨를 "위력 성추행 피해자"로 지칭했다. 한국여성단체연합도 10일 입장문에서 "피해자의 용기를 응원하며 그 길에 함께 하겠다"고 밝혔다.
한 여성단체 관계자는 "여성단체들에서는 원래 '피해호소인'이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 조사 과정 중 '가해-피해 이분법' 피하기 위해 나온 '피해호소인' 개념
'피해호소인'이라는 용어는 2011년 서울대에서 발생한 이른바 '담배 성폭력' 사건을 두고 학생들이 2년여에 걸쳐 논쟁하는 과정에서 쓰임새를 갖추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한 여학생은 어느 남학생이 '대화할 때 담배를 피우며 남성성을 과시했다'며 성폭력 신고를 했는데, 신고를 받은 사회과학대학 학생회장이 이를 반려하면서 학내 논란이 벌어졌다.
일부 학생단체가 단과대 학생회장이 2차가해를 했다고 비판했기 때문이다.
이후 진상 조사와 논쟁 끝에 학생회장을 2차가해자로 규정한 이들은 "사건 성격규정을 능동적으로 하지 않아 '담배' 부분까지 무리하게 성폭력으로 인정해버리는 모양새가 됐다"며 "'피해자 중심주의'를 왜곡한 것을 반성한다"는 입장을 내놨다.
논의 과정에서 학생들은 피해와 가해를 고정하는 이분법 구도를 피하기 위해 '피해호소인'이나 '가해지목인' 등의 말을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담배로 성폭력을 당했다는 학생을 '피해자'로, 남학생이나 학생회장을 '가해자'로 지칭하기가 애매해서 '피해호소인', '가해지목인'이라고 표현한 셈이다. ◇ "'피해호소인'이란 말, 지금 쓰이는 방식은 부적절" 지적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피해호소인'이라는 용어는 학교·회사 등 생활공간에서 성폭력 사건이 벌어질 경우 사건을 자체적으로 조사·중재하는 동안 구성원 사이에 과도한 분쟁을 방지하는 효과가 있다는 옹호론도 있다.
용어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는 취지다.
다만 일각에서는 현재 정치권이 사회적 이목이 집중된 사안에서 책임과 부담을 덜기 위해 굳이 '피해호소인'같은 표현을 쓰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윤김지영 건국대 교수는 "지금은 '피해자'와 '가해자'를 쓰는 것이 맞다"며 "민주당이나 서울시 등에서 '피해자' 대신 '피해호소인'을 쓰는 상황은 '피해가 진짜인지 입증되지 않았다'는 의미로 보이는데 이는 비판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현행 법률에도 확정 판결 전에 '피해자'라는 말을 쓰는 사례가 있다는 설명도 있다.
법학자인 홍성수 숙명여대 교수는 15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형사절차상 주의해야 하는 것은 범죄자(가해자)를 확정 판결 전에 유죄추정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라며 "피해자를 피해자라고 부르는 것에 주의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라고 썼다.
그는 "그동안 '피해자'라는 용어에 대해 한 번도 의구심을 갖고 있지 않다가 2020년 7월부터 갑자기 '피해호소인'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뭔가 이상한 것"이라고도 했다.
'피해호소인' 용어를 처음 제안했다는 2012년 당시 서울대 사회과학대학 학생회장 류한수진씨도 같은 날 "원론적으로 보아 시 당국이나 정당의 대표로서는 '피해호소인'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겠으나, 시민으로서 저는 이 시점에서는 고발자분은 '피해자'라고 칭하는 게 맞다고 본다"고 페이스북에 밝혔다.
그는 "절차 이전에 가해·피해를 확정짓지 않는다는 것은 성인지적인 의미에서 객관적이며 공정한 절차가 이뤄진다는 전제 위에 도입된 원칙"이라며 "이 사건(박 전 시장 피소사건)의 그 어디에도 그러한 절차를 기대할 만한 기관을 찾아볼 수가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공식기관의 대표들이 '피해호소인'이라는 대체어를 고집하는 것은 정말 유감스럽게도 실제로 보수 언론과 야당·논객들의 말대로 사건 자체를 무화하거나 최소한 가해자의 불명예를 누그러뜨리기 위한 목적으로 비친다"며 "또 의도와 상관없이 그런 효과를 어느 정도 발생시킬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연합뉴스
일각에선 "'피해자'가 맞다…책임 덜기 위해 '피해호소인' 써선 안 돼" 지적도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사망 후 장례나 조문 등을 놓고 논란이 벌어진 가운데 최근 며칠 사이에는 '피해호소인'과 '피해자'라는 용어 선택을 두고도 새로운 대립구도가 만들어지고 있다. 박 전 시장이 몸담았던 더불어민주당과 서울시는 이번 사건에서 '피해호소인'이라는 표현을 고수하고 있지만, 여성단체들은 '피해자'가 더 적절한 표현이라고 반박한다. ◇ 박 전 시장 고소인 호칭은 '피해호소인'? '피해자'?
이해찬 민주당 대표는 15일 박 전 시장과 오거돈 전 부산시장 문제와 관련 "피해호소인이 겪는 고통에 깊은 위로의 말씀을 드리며 이런 상황에 대해 민주당 대표로 다시 한번 통절한 사과를 말씀드린다"고 말했다.
서울시는 같은 날 입장 발표 때 '피해호소 직원'이라는 말을 썼다. 서울시는 이에 대해 피해 사실이 내부에 접수되고 조사 등이 진행돼야 '피해자'라는 말을 쓴다고 했다.
그러나 지난 4월 시장 비서실 남자 직원의 성폭행 사건 당시에는 고소한 직원을 '피해자'로 지칭한 바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박 전 시장의 장례위원회와 심상정 정의당 대표, 한국여기자회 등도 이번 사건과 관련한 입장을 밝히며 고소인을 '피해호소인'이라고 불렀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나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서도 여권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고소인 측에서 내놓은 증거로는 피해를 확정하기가 어렵다"는 이유 등으로 '피해호소인'을 고수하는 현상이 눈에 띈다.
반면 여성단체들은 대체로 '피해자'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박 전 시장을 성추행 등으로 고소한 전직 비서 A씨를 대리하는 한국성폭력상담소와 한국여성의전화는 13일 기자회견에서 A씨를 "위력 성추행 피해자"로 지칭했다. 한국여성단체연합도 10일 입장문에서 "피해자의 용기를 응원하며 그 길에 함께 하겠다"고 밝혔다.
한 여성단체 관계자는 "여성단체들에서는 원래 '피해호소인'이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 조사 과정 중 '가해-피해 이분법' 피하기 위해 나온 '피해호소인' 개념
'피해호소인'이라는 용어는 2011년 서울대에서 발생한 이른바 '담배 성폭력' 사건을 두고 학생들이 2년여에 걸쳐 논쟁하는 과정에서 쓰임새를 갖추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한 여학생은 어느 남학생이 '대화할 때 담배를 피우며 남성성을 과시했다'며 성폭력 신고를 했는데, 신고를 받은 사회과학대학 학생회장이 이를 반려하면서 학내 논란이 벌어졌다.
일부 학생단체가 단과대 학생회장이 2차가해를 했다고 비판했기 때문이다.
이후 진상 조사와 논쟁 끝에 학생회장을 2차가해자로 규정한 이들은 "사건 성격규정을 능동적으로 하지 않아 '담배' 부분까지 무리하게 성폭력으로 인정해버리는 모양새가 됐다"며 "'피해자 중심주의'를 왜곡한 것을 반성한다"는 입장을 내놨다.
논의 과정에서 학생들은 피해와 가해를 고정하는 이분법 구도를 피하기 위해 '피해호소인'이나 '가해지목인' 등의 말을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담배로 성폭력을 당했다는 학생을 '피해자'로, 남학생이나 학생회장을 '가해자'로 지칭하기가 애매해서 '피해호소인', '가해지목인'이라고 표현한 셈이다. ◇ "'피해호소인'이란 말, 지금 쓰이는 방식은 부적절" 지적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피해호소인'이라는 용어는 학교·회사 등 생활공간에서 성폭력 사건이 벌어질 경우 사건을 자체적으로 조사·중재하는 동안 구성원 사이에 과도한 분쟁을 방지하는 효과가 있다는 옹호론도 있다.
용어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는 취지다.
다만 일각에서는 현재 정치권이 사회적 이목이 집중된 사안에서 책임과 부담을 덜기 위해 굳이 '피해호소인'같은 표현을 쓰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윤김지영 건국대 교수는 "지금은 '피해자'와 '가해자'를 쓰는 것이 맞다"며 "민주당이나 서울시 등에서 '피해자' 대신 '피해호소인'을 쓰는 상황은 '피해가 진짜인지 입증되지 않았다'는 의미로 보이는데 이는 비판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현행 법률에도 확정 판결 전에 '피해자'라는 말을 쓰는 사례가 있다는 설명도 있다.
법학자인 홍성수 숙명여대 교수는 15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형사절차상 주의해야 하는 것은 범죄자(가해자)를 확정 판결 전에 유죄추정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라며 "피해자를 피해자라고 부르는 것에 주의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라고 썼다.
그는 "그동안 '피해자'라는 용어에 대해 한 번도 의구심을 갖고 있지 않다가 2020년 7월부터 갑자기 '피해호소인'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뭔가 이상한 것"이라고도 했다.
'피해호소인' 용어를 처음 제안했다는 2012년 당시 서울대 사회과학대학 학생회장 류한수진씨도 같은 날 "원론적으로 보아 시 당국이나 정당의 대표로서는 '피해호소인'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겠으나, 시민으로서 저는 이 시점에서는 고발자분은 '피해자'라고 칭하는 게 맞다고 본다"고 페이스북에 밝혔다.
그는 "절차 이전에 가해·피해를 확정짓지 않는다는 것은 성인지적인 의미에서 객관적이며 공정한 절차가 이뤄진다는 전제 위에 도입된 원칙"이라며 "이 사건(박 전 시장 피소사건)의 그 어디에도 그러한 절차를 기대할 만한 기관을 찾아볼 수가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공식기관의 대표들이 '피해호소인'이라는 대체어를 고집하는 것은 정말 유감스럽게도 실제로 보수 언론과 야당·논객들의 말대로 사건 자체를 무화하거나 최소한 가해자의 불명예를 누그러뜨리기 위한 목적으로 비친다"며 "또 의도와 상관없이 그런 효과를 어느 정도 발생시킬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