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구멍 낸 답안지 봉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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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서종 < 인사혁신처장 mpmhongbo@korea.kr >공직에 입문하고 몇 년 지나지 않아 공무원 공채시험의 채점 업무를 담당하게 됐다. 수십만 명 응시자의 합격과 불합격을 결정짓는 엄중한 임무였다. 여느 때처럼 20평 남짓의 좁은 방에서 답안지와 씨름하고 있던 어느 날, 직원 한 명이 사색이 된 얼굴로 내게 말했다. “답안지 한 장이 모자랍니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수십 년 넘게 지켜온 국가 채용시험의 신뢰성이 한순간에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몰려왔다.
다행히 사라졌다고 생각한 답안지는 사무실 한쪽에 쌓여 있던 수백 개의 답안지 보관봉투 안에서 겨우 찾아낼 수 있었다. 수십 장의 답안지가 들어 있던 봉투에서 한 장을 미처 꺼내지 않았고, 봉투 안을 들여다볼 수 없어 실수했는지 몰랐던 것이다. 이때부터 답안지 보관봉투 가운데에는 안의 내용물이 잘 보이도록 500원짜리 동전만 한 구멍을 뚫어놓게 했다. 이미 답안지를 찾아 문제가 해결된 상황에서 봉투에 구멍을 추가하는 일은 모두의 관심 밖의 일이었고, 누군가 알아주는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 사소한 구멍을 하나 만들어 놓은 덕분에 이후 수십 년 동안 봉투 안의 답안지를 빠뜨리는 실수는 발생하지 않았다.사실 채용시험 집행 업무는 공무원 사이에서 그다지 선호되지 않는 자리다. 정책을 마련하거나 법령을 입안하는 일이 아니라 현장에서 직접 땀 흘리며 뛰어야 하는 데다 실수했을 때의 책임이 엄청나게 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지난 60여 년 동안 공무원 공채시험이 큰 사고 없이 무사히 치러질 수 있었던 것은 채용시험 담당자들이 업무에 스스로 가치를 부여하고 부족한 점이 발견되면 끊임없이 개선하는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구멍 낸 답안지 봉투’처럼 작지만 의미있는 개선들이 수십 년 동안 쌓이고 축적돼 지금의 공채시험 체계가 구축된 것이다.
일의 가치는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일을 하는 스스로가 결정하는 것이다. 번거롭거나 사소하다고 여겨지는 일이라도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기에 따라 그 가치가 확연히 달라진다. 조직에서 누군가가 자신이 맡은 일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가치 없게 여기면 실수가 발생하고, 거대한 철교가 작은 불량품 하나 때문에 무너지듯이 한순간에 조직도 망가지게 된다. 내가 관리자가 되고 나서 주목받지 못하더라도 자기 일에 의미를 부여하고 전문성을 갖춘 직원들을 배려하려고 노력한 것도 이 때문이다.
채용시험을 담당하는 부서의 사무실 입구에는 ‘대한민국 공무원의 역사는 이곳에서 시작된다’는 문구가 적힌 커다란 현판이 걸려 있다. 누군가 현판을 만들라고 지시한 것이 아니다. 채용시험을 담당하는 공무원들이 자신의 업무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고 이 현판을 제작해 걸어놓았다. 공무원이라면 누구나 직위를 막론하고 자신의 일에 가치를 새겨놓은 자신만의 현판을 마음속에 품고 있었으면 한다. 공무원이 스스로에게 지극히 정성스러워지면 이내 대한민국이 바뀔 것이니.